나는 투명한 그물에 걸려있는 빛나는 보석이다
『현대일본생협운동소사』 . 그물코 2012.03.01.
공정경, 아이쿱생협 언론활동팀
성탄절 전야, 하얀 편지봉투가 식탁 위에 놓여있었다. 보내는 사람은 ‘00아파트 관리사무소’
봉투를 열어보니 경비원을 해고한다는 얘기이다. 38명 중 18명을 줄여 20명만 두고 싶은 데 동의할지, 반대할지 표시를 하란다.
2015년 1월부터, 아니 5일 후부터 시행되는 ‘아파트 경비원 최저임금제’와 ‘10시간 근로시간 보장’으로 돈이 많이 들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아파트입주자대표들이 주민 여러분을 위해 경비원의 대략 48%를 알아서 해고하려 하니 주민들은 동의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다. 비용도 친절하게 표로 비교해 보여준다. 20명이 일할 때 월 약 3천6백만 원, 38명이 일할 때 약 6천5백만 원.
비용을 비교해보니 누가 봐도 동의를 해야 할 것 같다. 만약 반대하면 합리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옆집 가계경제에 지대한 피해를 입히는 꼴이다.
먼저 문서에는 반대에 동그라미를 그려 ‘난 반대요’라고 의사를 밝혔다. 다음 네임펜을 들고 봉투에 크게 썼다.
“CCTV 늘릴 생각만 하지 마시고 사람이 일하는 일자리를 먼저 생각하세요. 입주자대표님들”
봉투에 쓴 이유는 반대 이유를 쓸 칸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아파트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아예 없지는 않을 텐데.
입주자대표들은 이리 의기 당당하게 얼음 권력의 목소리로 주민들에게 강요하다시피 하는데, 왜 반대의견을 가진 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까. 이럴 때 몇몇이라도 목소리를 같이 낸다면, 모기만 한 목소리라도 모이기만 한다면 최소한 참새의 짹짹거리는 소리라도 낼 수 있을 텐데.
물론 경기도 과천의 한 아파트처럼 ‘따뜻한 아파트’도 있다. 주민자치로 해고하지도 않으면서 비용도 절감하는 경우이다.
아파트경비원 최저임금제로 해고위기에 놓인 경비원이 2만 명이다. <영화 카트>의 소재가 된 2007년 홈에버 사태를 되돌아보면, 홈에버 뿐 아니라 뉴코아 등 1만 2천 명이 넘는 대형마트 직원이 실직위기에 놓여 있었고 해고됐다. 한창 추운 겨울 실직 위기에 놓은 경비원 2만 명은 숫자만 봐도 이보다 훨씬 더 많다.
이제 <현대 일본 생협 운동 소사>로 이야기를 넘기겠다. 제목부터 세로로 돼 있어 가로로 쓸 때 띄어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몇 번 생각해야 하고, 옮긴이 이름을 보니 ‘다나카 히로시’이다. 일본사람이 쓴 책을 일본사람이 한국어로 번역했다. 지난달부터 이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평을 쓰는 입장에서 정들기가 어려운 점이 여럿 있었다.
마지막 장 ‘현대일본생협운동 연표 1877-2006’을 보자. 연표의 가장 위 칸을 보면 “정치·경제·사회 / 생협 관련”이라고 쓰여 있다. 일본 생협은 1877년부터 지금까지 그 나라 역사의 흉흉한 흐름 속에 함께 왔고, 지금도 그 속에 함께 있다는 의미이다. 2006년 이후 더 넓은 안목으로 세계의 협동과 함께, 유니세프와 함께, 생물 다양성과 함께. 더 깊은 안목으로 사회에 열린 조직으로 지역사회와 함께,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품과 서비스와 함께 일본생협은 가고 있다. 우리나라 생협의 역사도 큰 흐름에서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15년부터 새로운 아이쿱활동연합회(2기)가 꾸려지는 시점, 이 책이 시사하는 점이 있다.
2013년부터 올해까지 아이쿱이 유난히도 사회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철도민영화반대, 의료민영화반대, 제대로 된 세월호특별법제정 요구, 쌀개방반대, 해고노동자지원, 설치수리기사 응원하는 진짜해피콜 캠페인, 농축산업 이주노동자인권보호 등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그 영역이 종횡무진이다.
그래서 너무 사회운동으로 치우치고 조합원은 안 챙기는 거 아니냐고 우려와 불만의 목소리도 종종 있다.
<현대 일본 생협운동 소사>를 보니, 결론은 둘 다 같이 가면 된다.
사회에 열린 조직 그리고 조합원에게 최대한 공헌 할 수 있는 물품과 서비스.
붓다가 깨달은 것 중 연기(緣起)의 법이라는 게 있다. 붓다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 상응부경전 12:21”
‘연기’는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는 모두 그것이 발생할 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겨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자기와 관련 없는듯해 보이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상상을 해보자. 우주에 거미줄처럼 투명하고 반짝이는 그물이 있다. 그 그물에는 빨강, 노랑, 파랑, 초록, 핑크 등 색색의 보석이 박혀있다. 누군가 보석 하나를 떼어내려 잡아당기면 그물은 전체가 흔들린다. 따로따로 떨어져있는 듯 보이는 보석들이지만 파장으로 흔들리지 않는 보석은 없다.
2015년은 올해보다 더 넓고 촘촘한 협동과 연대만이 희망일 것 같다.
* 매번 격려의 말로 용기를 주고 부족한 글을 기꺼이 실어준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와 읽어주신 분께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