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부에 바란다.
김종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단순히 시장과 정부만 있다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불행해진다. 기존의 시장은 소수 주주의 지배에 의해 운영되며, 그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움직인다. 자본의 안정성과 수익성 확보가 경제활동의 주목적이며 일하는 사람들은 도외시된다. 화려한 삼성전자의 성공신화가 한국인 모두의 행복증진과 별로 연결 안 된다는 점은 이미 상식에 가깝다.
정부 또한 시장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줄 수 없다. 정부란 “국민복지에 복무하는” 추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구체적으로는 정치인과 관료의 세계를 말한다. 정치인의 목적은 자기권력의 극대화이며 관료 또한 자기보신의 안정성이 중요하다. 공인(公人)이란 공공의 목적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만을 가진 일개 ‘사인’(私人)에 불과한 경우가 많은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자본에 의해 독점화된 시장, 정치가와 관료의 자기이익에 장악된 정부만 있다면 복지국가는 그야말로 요원한 과제로 된다.
필자는 협동조합, 사회적기업과 같은 사회적경제의 발전이 시장과 정부의 기능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수단임을 인식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협동조합이던 사회적기업이던 간에 기존의 시장과 정부가 제공하던 자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작동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은 주주가 아니라 조합원들의 민주적인 참여와 결정에 의해 움직인다. 때문에 조합원들의 일자리와 복리후생을 제일의 가치로 생각한다. 사회적기업도 바로 고유한 사회적목적의 실현을 위해 기업활동을 한다. 이윤이 아니라 사람을 그 중심에 넣고 있기에 기존의 시장보다 더욱 인간적인 것이다.
각종의 복지서비스가 공무원들의 손에 의해 장악되는 것보다는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에 맡겨졌을 때 보다 잘 작동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을 우리는 이미 사회적 경제가 잘 발달된 나라와 지역들, 즉 스코틀랜드, 이탈리아북부, 스페인 몬드라곤, 캐나다 퀘벡 등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사회적경제가 단순히 시장과 정부의 기능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인류의 새로운 경제사회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지름길인지 필자는 단언할 수 없다. 그러한 논쟁에 관여할 생각도 별로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세상을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이 충분히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경제발전의 쇠락, 급속한 기술발전과 지식·기술·노동능력의 양극화, 지역경제의 쇠퇴, 복지수요의 증대와 재정의 압박이라는 현실 속에서, 문제해결을 위해 사회적경제의 발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적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에 있어서 사회적경제영역의 발전은 많이 미흡했다. 사회적기업육성법(2007) 이후 사회적기업에 대한 지원은 크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성장은 아직까지 국제적 수준에 상당히 못 미친다. 협동조합의 경우에 있어서도 작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이 발효된 이후 이제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나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미흡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적어도 다음의 3가지 측면이 새로운 정부에서 제대로 논의되고 구상되기를 바란다.
첫째는 사회적경제영역이 향후 한국사회의 발전에 필수적이라는 비전을 제대로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데이비드 캐머런 정부의 국정아젠더인 ‘큰 사회’(big society)론은 영국이 ‘깨진 사회’(broken society)로 되어간다는 위기감의 반영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회적경제의 강화가 자리잡고 있다. 2012년을 세계협동조합의 해로 규정한 유엔의 결의, 프랑스 올랑드 신정부에서 새로운 경제부처로서의 사회경제연대부를 창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분야가 정부정책의 중심 아젠더로 발전하고 있지 못한 듯하다. 협동조합기본법 제정, 사회적기업육성, 미소금융 등 개별적으로는 좋은 정책체계가 구비되어 있음에도 이 모든 것이 국정의 ‘브랜드’로서 기능한다고 보이지 않는다. 생활의 기본이 ‘말(言)’을 제대로 세우는 것이며, 학문의 기본이 ‘개념’을 제대로 세우는 것이듯 국정의 기본은 그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하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국정아젠더로 설정한 이후에는 관계된 모든 정책들과 예산들을 통합·조율하는 것, 그리고 사회적경제를 한국의 복지전달체계 속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가령 2011년 2월 발간된 「정부 재정지원 일자리 사업 현황자료」에는 총 22개의 중앙부처 및 부처 소속 청에서 시행중인 169개의 사업이 수록되어 있었다. 적어도 이 중 90여개에 달하는 직접일자리사업의 상당 부분은 사회적기업, 사회적협동조합의 방식으로 운영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하다.
특히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정부의 관련정책이 통합된 원칙과 전달체계를 정비하지 못해 채 각개로 중복되어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우리의 사회적경제와 관련된 부처는 사방에 산재되어 있다. 사회적기업(고용노동부), 마을기업(행정안전부), 농어촌공동체회사(농림수산부), 자활(보건복지부), 협동조합(기재부, 행안부, 금융위, 농림수산부 등)과 같이 모두 각개로 쪼개져 있다. 각 부처의 전문성을 살리면서 다양한 분야로 사업들이 추진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중복된 사업이 따로따로 벌어지는 비효율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앞으로 생각되어 질 수 있는 방식은 대통령직속위원회로서 ‘사회적경제위원회’를 만드는 것, 각 부처의 사회적경제관련 업무를 통합하여 새로운 부처(가칭 ‘연대사회경제부’)를 만드는 것, 청와대 내 사회적경제 기획관실을 만들고 이 곳에서 전체적인 정책을 조율하는 것이다. 첫 번째 경우 기존의 ‘위원회’가 실행력을 갖기는 어렵다는 것을 보면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듯하다. 두 번째의 별도부처 창설은 각 부처의 자유로운 사회적경제영역으로의 진입을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용할 것이라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세번째 안이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지나 이미 청와대 내의 모든 ‘기획관’실을 폐쇄시키기로 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결정을 보면 이 또한 녹녹한 일은 아니다.
셋째로 사회적경제의 성장생태계의 조성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사회적경제 활동가(기업가)의 양성체계이다. 사회적경제를 만약 “한 사회 속에 존재하는 스스로 잘 살고자 하는 노력들과 선한 의지들을 경제적으로 결합시킨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상당한 능력을 가진 사회적경제 활동가(기업가)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람들 속에 있는 선한 의지를 조직하고 그것을 사업이라는 형태로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은 ‘활동가’의 능력만이 아니라 ‘기업가’로서의 자질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이 잘 발달한 이탈리아 트렌티노지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문맹률이 이탈리아에서 거의 최고수준의 후진지역이었다. 사회적기업이 발달한 스코틀랜드도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무대가 될 만큼 황량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득 면에서도 그리고 생활의 질 면에서도 상당히 좋은 지역으로 뽑힌다. 결국 ‘사람’인 것이다.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의 노력을 조직할 수 있는 선구적인 운동가들의 집단, 그리고 그 집단을 세대 간에 계승시켜 가는 교육이 중요한 이유이다.
2013년 한국은 복지가 화두이다. 신정부도 복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기존의 시장과 정부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복지와 사회적경제의 영역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만 한다. 즉 사회서비스의 전달체계 속에 사회적경제영역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어야만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그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국정아젠더로서 제대로 세우는 것이다. 관련부처와 기능을 통합하고 정부복지서비스 전달체계 속에 사회적경제영역을 적극 편입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이러한 기반 위에 현장에서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의 가능성을 확대시켜 갈 새로운 활동가를 양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비전, 실행체계의 정비, 정부예산의 사회적경제로의 이양, 이것을 담당할 활동가의 양성, 이 모든 것이 신정부의 출범과 함께 대대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나, 지금까지는 그 시급성을 인식하고 있지 못한 듯해 섭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