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쿱에서 이사장으로 살아가기

고명희(부천아이쿱생협 이사장)

밤새 온 함박눈이 모든 도시를 뒤덮을 것처럼 새하얀 날 아침, 아이쿱생협에 첫발을 디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30대 동안 여성운동 단체에서 일을 했었고, 나이 마흔이 되는 즈음에 남은 40년을 잘 살기 위한 도전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그 끝에서 아이쿱을 만났다 그리고 아이쿱에서 활동가로 10년 동안 희로애락을 나누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여성, 커뮤니티, 마을, 임파워먼트, 리더십, 협동조합, 새로운 일에 대한 상상과 기대로 만난 아이쿱을 통해서 나는 성장하고 성장하였다.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은 1천만 명을 넘어서고 있으나 여전히 육아, 가사일, 부모 돌봄을 도맡아 하는 여성들은 결혼 전 일했던 직장을 다닐 수가 없어서 경력이 단절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를 포함해서 아이쿱의 활동가는 대부분 아이를 둔 가정주부이면서 경력단절여성이다.

전일제 근무를 하는 직장에 다니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사적영역에서 가사일과 돌봄을 하면서 공적영역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여성에게 생협 활동은 매력적인 곳이다. 나 역시 세 아이를 둔 가정주부이자 경력단절 여성으로 짬짬이 시간을 내서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내가 하고 싶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욕구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겪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으며, 내 세대의 활동가들이 아이쿱에서 시작하여 여기에서 혹은 지역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보고 있다. 나 또한 내년 2월이면 이사장의 임기를 마치고 이 자리에는 새로운 후배가 그 역할을 이어받게 된다.

나는 아이쿱에서 ‘조직’을 배웠다. 협동조합 조직이 작은 소시민들의 소소한 염원으로 만들어지고, 그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사람들이 보다 민주적이고 공정한 운영을 위해 어떤 소통을 하고 노력을 기울이는지, 주장만이 아닌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직접 경제 사업에 뛰어들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과 땀방울이 모이는지를 보았다. 조합원들의 소중한 출자금을 모아 자연드림매장을 만들고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거리마다 아파트마다 전단지를 배포하고 직원들을 채용하고 인사관리를 하고 재무제표를 보면서 경영현황을 파악하고 앞일을 계획하는 것을 아이쿱이 아니었으면, 내가 그냥 개인으로 있었으면 경험할 수 있는 일일 수는 없다.

나는 아이쿱에서 ‘사람’을 얻었다. 내가 이 조직에 첫발을 디뎠을 때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질문과 의심으로 대들었던 나를 협동조합인으로 만들기 위해 지치지 않는 모습으로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신 선배들이 있다. 가랑비에 옷 젖듯 ‘다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가 뛰어든 이 조직의 가는 길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된 어느 순간 누군가 알려주었다. 당신도 그 선배가 되어 있다고. 150여 년 전 영국 로치데일의 작은 마을에 첫 협동조합 매장의 불이 환하게 켜진 밤의 감동을 영화로 보며 그 당시 선구자들의 DNA가 우리 피에 흐르고 있다는 믿음과 안심과 확신이 우리를 계속 이길 위에 있게 하였다. 조직의 목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여 같은 길을 걷는 다는 것은 많은 이견이 드러나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의 다른 생각을 모으는 것은 자주 갈등상황에 놓이게 되고 그것을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애달프고 고심하며 대화하고 손 내미는 것을 일상으로 하다 보니 이제는 사람 만나는 것이 익숙해졌다.

나는 아이쿱에서 ‘리더’였다. 이사장은 여러 활동가 중에서도 가장 많이 책임지고, 더 먼저 보고, 더 노력하며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조합원 리더이다. 다소 내성적이면서 소그룹으로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초중고를 통틀어서 반장조차 해본 적이 없다. 여성단체에서도 사무국장으로 일을 해보았지만 아이쿱에 들어오면서 내가 이사장을 맡게 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이사장이라는 역할이 주어졌을 때 너무 어색하고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아서 선출된 후 몇 달 동안은 주저주저하면서 소심한 상태로 있었다. 몇 달이 지난 후 내 주변을 돌아보니 활동가들도 조합도 모두 나와 같은 상태라는 것을 확인하고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조합원 총회에서 선출이 되고 나에게 주어진 직분을 내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깨달음 속에서 그 날 이후로 내 SNS의 프로필사진은 ‘부천아이쿱’이다. 나는 앞으로 ‘걸어 다니는 부천아이쿱’이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이사장으로 당연히 힘든 일은 수두룩했지만, 나는 전체를 보는 큰 눈을 얻었고,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대화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어려운 일에도 참고 인내하고 끝까지 이루기 위한 끈기를 배웠으며, 궁극으로는 노력하는 나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은 “내가 남보다 잘 보고 멀리 본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 탈 수 있었던 덕”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거인의 어깨’는 어느 누구도 앞선 사람, 즉 선구자와 동료들이 없었다면 자신의 모든 물리학적 발견과 연구 성과를 이룰 수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나도 거인의 어깨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내 뒤의 후배도 나의 어깨를 빌려 그 다음 전진을 이루어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퇴임을 앞둔 아이쿱의 이사장으로서 나의 앞길에 대한 두려움과 막연한 공포가 없을 수는 없다. 미리 예견되어 있는 일이지만 마침과 새로운 시작은 왠지 낯설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이 자연스러울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쿱과 함께 한 시간을 돌아보니 나의 지배적인 감정은 여러분을 향한 ‘고마움’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족하고 보잘 것 없었던 작은 여성인 나에게 배움과 깨달음의 공간에서 ‘의식을 지닌 존재’로 살게 해준 아이쿱에서의 경험은 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지 않았을까. 이제 나는 더 빛나는 눈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 앞에 펼쳐진 길을 걷고자 한다. 진흙탕을 걷기도 하고 꽃길을 걷기도 하며 다른 거인의 어깨 위에 또 살포시 앉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길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후배에게 내 어깨를 빌려주는 거인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