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스톰이 다가온다

김종걸(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원장)

대한민국은 지금 거대한 시대적 전환의 한복판에 서있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사회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것은 시대전환의 창조적 파괴가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기의 시대는 기존에 믿어왔던 모든 것을 근저로부터 뒤흔들고 있다. 이 시대적 전환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위기의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에 직면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3저(低)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저성장, 저일자리, 저출산의 3저 시대다. 무엇보다 미래세대인 청년실업은 IMF 경제위기 이후 최악이다. 2018년 3월에는 11.6%(51만명)을 넘어섰다.만약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저성장의 고착화로 인해 일자리는 더욱 더 사라질 것이다. 한편 우리는 3불(不)의 시대, 즉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 기회의 불평등, 지역발전의 불균형 속에 살고 있다. 세칭 ‘금수저’들은 혼맥·학맥·금맥의 동심원을 이용하여 사회적 지위를 겹겹이 쌓아나간다. 소득불평등의 심화, 노동소득분배율의 하락, 비정규직 비율의 증가, 가계소득과 기업소득 간의 격차확대, 절대빈곤율의 상승 등 한국 땅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중산층이 몰락하고 빈곤이 대물림되는 세상인 것이다.

1. 대한민국의 5대 위기

1) 인구변동과 지역소멸의 위기

중장기적으로 대한민국을 규정하는 첫 번째 위기는 바로 ‘인구변동과 지역소멸의 위기’다. 2017년 합계출산율 1.05명은 한국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보여준다. 합계출산율이란 우리나라 여성이 평생 출산하게 되는 아이의 숫자다. 그 숫자가 2 미만이라는 것은 당연히 장기적으로 5000만명의 인구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짐을 알려준다. 통계청의 장기인구추계에서는 30개 정도의 미래 시나리오를 그린다. 그 중 가장 중간(중위) 추계치를 취한다면 2058년에는 4613만명, 2060년 4525만명, 2065년 4302만명으로 줄어든다. 가장 비관적인 시나리오라면 2065년에는 1977년 수준인 3,666만명까지 감소한다.1)

경제의 성숙화와 함께 인구성장이 둔화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우리나라도 1970년 이후 가파르게 하락하여 2000년에는 0.84%, 2017년에는 0.39%까지 하락했다. 그러나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은 별개 이야기다. 고령화추세까지 감안한다면 한국의 경제적 활력은 급속히 줄어들 것이다. 각종 인구전망은 미래 한국의 고령화비율이 일본과 함께 세계 최고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인구감소, 고령화 속에서 일자리가 잘 확보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한국의 기업들은 `노동을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본을 더 많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해 왔다. 불안한 노사관계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나 한국경제가 고용친화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4차산업혁명의 진행과 함께 일자리가 급속히 감소할 위기는 항상 존재한다(‘보충읽기’ 참조).

더욱 심각한 것은 인구의 지역별 편차다. 기초지자체의 눈으로 보면 인구이야기는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진다. 어떤 지역은 급속히 인구가 늘어나고 더욱 젊어진다. 어떤 지역은 지역 자체가 소멸한다. 필자가 연구책임자가 되어 기초지자체의 장기인구추계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222개 기초지자체를 대상으로 2048까지 인구추계를 해 보면 흥미로운 대한민국의 인구지도가 완성된다. 부산기장군, 경기김포시, 인천서구, 경기화성 등 19개 지역은 인구가 100% 이상 증가된다. 그러나 167개 지역에서는 인구가 감소하며, 전남고흥, 경남합천 등 21개의 지역에서는 인구가 절반 이하로 급감한다. 고령화추세도 마찬가지다. 2048년 노인인구 비율이 50% 이상인 곳은 62개 지역(기초지자체)에 이르며, 심지어 60%를 넘는 곳도 경남합천을 비롯하여 12개 지역에 달한다. 노인인구가 50%를 넘는 62개 지역들 중에는 경남밀양, 전북김제, 경북영천 등 지방 중소도시 이외에도 부산서구, 서울중구, 대구남구·서구, 광주동구 등과 같은 대도시 내 지역들도 일부 포함 되어 있다. 마을 단위에서는 모를까 기초지자체 단위에서 65세 이상의 인구가 반 이상의 경우는 현재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2013년 주민등록 기준 노인인구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전남고흥이었다. 그 곳의 노인인구비율이 34.6%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50% 혹은 60%의 고령화비율이란 상당히 극단적인 수준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의 지방행정체계는 유지 가능할까? 가령 2048년 인구 5만미만의 기초지자체는 총 82개이며, 인구 2만 미만도 18개나 된다. 해당지역을 통폐합할지 아니면 지금의 기초지자체의 틀을 전면적으로 바꾸어야 할지도 문제다. 보건서, 소방서, 경찰서, 보육원 등의 각종 시설들에 대한 재배치 또한 요구된다. 인구적 차원에서 우리에게 제기되는 과제는 경제적 활력의 유지, 노인대책 등의 전통적인 사안만이 아니라, 생활공간으로서의 국토이용계획과 행정재배치까지 포함한 더 넓은 범위의 대한민국의 재설계인 것이다.

<그림> 2048년 인구 5만 미만 기초지자체

자료 : 김종걸 등. 『인구구조변화와 지속가능한 행정기능 발전방안』(2015년, 행정자치부).

주 : 색칠되어 있는 곳은 인구 5만 미만 기초지차체(총 82개). 진하 ㄴ곳은 2만 명 미만.

2) 성장과 고용의 위기

한국을 규정하는 두 번째 위기는 “성장과 고용의 위기”다. 고도성장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각종 잠재성장의 추계에서도 2020년대에는 연평균 2.2%, 2030년대는 1.9%, 2040년대는 1.5%, 2050년대는 1.2%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된다.3) 어떻게 하면 경제적 활력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 시대적 과제다. 하나 분명한 것은 거대기업의 눈부신 성공이 대한민국 경제 전체의 성공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성장의 군불이 ‘아랫목’에서 ‘윗목’으로 전파되지 않았다. 거대기업 성장의 온기가 사회 전체로 퍼지지 않으며, 그들의 혁신은 국민경제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거대재벌기업이 한국경제에 대해 미치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아주 다양한 논점에서 이야기가 된다. 하나의 극단은 재벌대기업이 한국경제의 자부심이며 희망으로 생각하는 경우다. 한국경제의 국제적 위상의 증가는 이들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의 강화와 연동되어 해석된다. 또 다른 극단은 재벌대기업이 대한민국의 성장력을 잡아먹고 있다는 비판이다. 거의 전 산업부분에서 재벌대기업이 독과점적 시장지배력의 실현은 국민경제의 공정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여기에 일부 재벌 2세, 3세들이 보여주는 비상식적인 행동과 불법행위들은 국민들의 공분을 산다.

세상사 많은 경우가 그렇듯 진실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 대부분의 재벌대기업이 비효율적이지도 않으며, 모든 재벌 2세 3세가 그리 못돼먹은 것도 아니다. 높은 성장성과 이윤율은 약탈적인 시장지배력의 결과가 아니라 혁신과 경쟁력의 결과인 경우도 많다. 대한민국의 가장 좋은 인재들만을 선별해서 일부만 빨아들이고 있는 이들 기업에 있어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4) 그러나 우리의 고민은 그 다음 단계부터 시작된다. 재벌대기업이 아무리 투명하고 준법적인 조직으로 변환된다 하더라도 5000만 국민의 먹거리와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2015년 기준 광공업에 있어서 공정거래위원회 발표 대규모기업집단(61개)이 차지하는 비율은 출하액(46.5%), 부가가치액(44.0%), 종사자수(18.3%)로 나타난다.5) 이 사실은 재벌대기업이 아무리 발전한다 할지라도 한국경제에 있어서 성장과 고용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낙수효과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이미 여러 곳에서 확인된 것이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교수는 “자유주의자의 양심”이라는 저서에서 심지어 낙수효과란 거짓말이라고도 단언한다. 경제학적 논리가 아니라 정치적 선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6) 오죽했으면 프란체스코 교황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다. 취임 이후 첫 공식문서였던 ‘복음의 기쁨’ 제54항에서, 낙수효과를 믿는 것은 지금의 주류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의 ‘선의’를 믿는 아주 ‘순해빠진’(naive) 행위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셨다.7) 이제는 재벌대기업으로부터가 아니라 ‘밑’으로부터의 새로운 혁신이 필요하다. 특히 한국과 같이 대기업과 기타부문 간의 생산성격차가 아주 큰 곳에서는 한국경제를 구성하는 기초단위 하나하나에서 새로운 혁신의 경로가 설계되지 않는 한국경제 전체의 발전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면에서 재벌대기업에 대한 비판만으로 한국경제가 활력을 되찾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나이브’한 생각이다.

<그림> 2014년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 생산성 비중

자료 :http://www.oecd.org/eco/economic-survey-korea.htm

3) 불행과 격차의 확대

대한민국을 규정하는 3번째 위기는 ‘불행과 격차확대의 위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만큼 경제지표와 사회지표가 괴리되어 있는 나라도 드물다. 2017년 11월에 발표된 ‘한국인의 생활’이라는 OECD의 문서는 한국인의 생활수준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알려준다. 그 중에서도 빈곤율, 임금 불평등, 건강에 대한 자신감, 사회로부터의 지원, 투표율, 공기의 질, 생활만족도 등은 OECD 국가들 중 가장 열악한 1/3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된다.8) OECD라고 선진국만 모여 있는 것은 아니다. 멕시코 칠레 체코 헝가리 터키 등 중진국도 수두룩하다. 그런데도 한국의 불행지표는 두드러진다. 다음해 발간된 OECD의 ‘한국경제보고서’에서도 불안한 한국사회에 대한 지적은 계속된다.9)

①한국의 임금격차는 높고 또한 빠르게 증가한다. ②한국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는 OECD 국가 중 거의 최하위다. ③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아주 빠르다. 65세 이상 인구의 15-64세 인구에 대한 비율은 2015년 19%에서 2050년에는 72%로 증가할 것이다. ④남녀 간의 임금격차는 2016년 37%로서 OECD 평균 14%를 훨씬 넘어선다. ⑤저임금 노동자의 비율이 높다. 중위임금의 2/3 미만 임금을 받는 노동자 비율은 23%로 OECD 평균 16%보다 높다. ⑥여성은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에 집중되어 있다. 남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2017년 26%이나 여성은 41%이다. ⑦50세 이상 고령자의 상대적 빈곤율이 높다. 2015년 51-65세의 상대적 빈곤율은 14%로 OECD 평균 11%보다 높다. 65세 이상은 OECD 평균 13%보다 3.5배 높은 46%에 달한다.10) ⑧한국의 초미세먼지(PM2.5) 노출인구비율은 평균 32%로 OECD 평균 14%를 훨씬 넘어선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은 아주 제한적이다. 같은 보고서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17쪽). “한국의 공공사회지출은 1990년 이후 OECD에서 가장 빠른 속도인 매년 실질 11%씩 증가해왔다. 그러나 2016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4%로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낮은 공공사회지출과 함께 세금 및 보조금 등이 경제적 불평등과 상대적 빈곤을 경감시키는 효과는 OECD에서 가장 약하며 낮은 누진세율로 중산층 혹은 고소득층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이득이 귀속된다.”11) 적어도 구매력 평가(PPP)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이 이미 선진국이다. 2016년 한국이 3만5020달러로, 스페인(3만4272달러), 이탈리아(3만5220달러), 프랑스(3만8605달러), 일본(3만9002달러), 영국(3만9753달러)보다 많거나 아니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다. 그런데도 복지격차는 아주 크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정부가 복지에 돈을 쓰고 있지 않고 있으며 국민도 복지를 위해 돈을 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복지지출규모는 GDP 대비 10.4%로 OECD 평균 21%에 한참 못 미친다. 세금과 사회보험료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인 국민부담율도 25.3%로서 OECD 평균 34.3보다 한참 작다.12) 사실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별반 징수하지 않는 곳에서 복지국가를 만들겠다는 구호는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당연히 증세가 필요하나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무책임한 일이다.

<그림> 연령별 상대적 빈곤을 비교

4) 강고한 관료주의

이상과 같은 문제에 한국의 관료 및 정치체계가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관료의 조직이기주의는 수많은 정책을 남발하며, 새로운 규제를 양산해 나간다. 정치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국민을 대신해서 공무원을 효과적으로 일시키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나 그것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동안 한국의 우수한 관료체계는 우리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은 경제개발을 위해 우수한 관료에 입각한 정책체계 및 실행체계를 구비한 나라를 개발국가(Developmental State)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적이 있었다. 주로 일본을 분석하면서 도출된 개념이나 이러한 개념은 이후 한국과 같은 나라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기 시작했다.13) 동아시아, 특히 한국 관료의 우수성은 1994년에 출판된 세계은행의 유명한 보고서인 『동아시아의 기적』에서도 그대로 강조되었다. 한국이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정책과 같은 시장개입 정책에 있어서 그나마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①경쟁에 입각하여 지원의 성과를 차별화하고(Contest Based), ②그것을 잘 판단하고 실행할 수 있는 공정한 심판자(Fare Umpire)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들은 설명했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엄격한 시장성과에 의해서 규율 받는다는 차원에서 그들은 동아시아의 정부개입방식을 ‘시장친화적 접근법’(Market Friendly Approach)이라고 명명했다.14) 심지어 함재봉 교수와 같은 논자(소위 아시아적 가치론자)들은 유교의 위민(爲民)사상에 기반 한 정부의 강력한 책임의식, 관료와 지식인의 철저한 민본주의 정신이 그 기반에 있었다고 칭송했다.15) 그러나 적어도 2019년 현재 대한민국의 관료사회의 기본정신이 위민사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앙부처의 조직이기주의를 타파하자는 부처 간 칸막이 제거는 모든 정부의 중요한 국정과제이었음에도 현실에서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정부부처 내에 수많은 유사사업이 남발되며 서로 조정되지 않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15년 복지사업(사회보장사업)의 유사중복성을 조사하고 조정대상사업을 선별한 바 있었다. 연구결과는 중앙정부의 경우 총 분석대상 총 265개 사업 중 21개 영역 60개 사업이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지방정부의 경우에는 총 678개의 사업 중 153개의 사업이 조정대상이었다.16) 사업목적과 기능이 동일 혹은 유사하거나, 동일한 대상자에 대해 같은 사업이 각각 다른 부처, 부서, 동일 부서 내에 존재하는 경우를 모두 열거한 것이다. 한국사회에 복지와 일자리가 강조되면서 거의 모든 부처들은 유사한 사업들을 남발한다. 사회보장사업의 경우 복지부의 비중은 사업기준 39%(예산기준 41%)에 불과하며, 21개의 부처가 사회보장사업과 연관되어 있다.

다양한 정책들이 실시되고 그것이 국민들의 ‘필요’를 잘 만족시켜 준다면 그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수많은 정책이 실시되는 이유는 많은 경우 부처이기주의(조직과 예산 키우기)와 관련 이익집단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청년, 노인, 장애인, 여성, 지역발전, 주거문제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하듯이 새로운 정책을 토해낸다. 정부의 정책연구기관과 해당 분야의 학자들은 ‘프로젝트’란 이름의 설익은 정책을 수없이 써내려간다. 전 세계에서 작동되는 정책 중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 정책은 거의 없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우리의 정책난맥상은 심각하다.

<표> 유사중복 사회보장사업의 사례

자료 : 강혜규 등, 『사회보장사업 실태조사 및 유사·중복사업의 조정방안 연구』(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정책보고서, 2015년)의 내용을 정리.

5) 공동체적 신뢰의 위기

다섯째는 ‘신뢰의 위기’다. 각종 연구는 한국의 사회자본 수준이 상당히 낮다고 보고한다. 가령 현대경제연구원의 연구에서는 분석대상 OECD 32개국 중 29위였다. 분석은 논리구조는 다음과 같다. 사회자본을 ‘사적 사회자본’과 ‘공적 사회자본’으로 나눈다. 그리고 각각을 ‘신뢰’, ‘배려’, ‘참여’라는 3가지의 카테고리로 구분한다. 각각의 카테고리를 대표하는 지표 5개씩을 선정하여 총 30개의 지표로 사회자본의 정도를 파악하는 것이다.17) 한국이 타국에 비해서 특히 낮은 곳은 ‘공적 신뢰’ 부분이다. 사법부, 행정부, 교육시스템 등에 대한 신뢰는 최하위권이다. ‘사적 신뢰’ 역시 가족을 제외 한 친척·친구·타인에 대한 신뢰가 아주 낮다. 성소수자, 이민자에 대한 관용 등을 나타내는 ‘사적 배려’ 또한 낮다. 그런대도 희망적인 것은 선거참여 등과 같은 ‘공적 참여’, 그리고 자원봉사와 같은 ‘사적 참여’가 평균이상의 수준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이슈가 생길 때마다 광화문과 서울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우는 사람들의 모습들, 그리고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고와 같이 국가적 재난 시에 모두 팔 걷고 나서는 모습 들은 이런 한국인의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잘 나타낸다.

<표> 한국의 사회자본

자료 : 현대경제연구원, 『OECD 비교를 통해 본 한국 사회자본의 현황 및 시사점』, 2014.5.23.일.

이러한 모습은 사회인식과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국제공동연구인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에서도 잘 보여준다. 최신판인 2010년 조사에서 사회자본의 선진국 스웨덴과 비교해보면 한국의 공적기관에 대한 신뢰가 상당히 낮음을 알 수 있다. 조사대상에 대해서 ‘전혀 신뢰 못 한다’ 혹은 ‘상당히 신뢰 못 한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은 각각 가족(0.5%, 1.6%), 이웃(4.7%, 22.9%), 경찰(6.8%, 34.7%), 법원(6.8%, 25.9%), 중앙정부(11.4%, 38.9%), 노동조합(13.7%, 47.1%), 정당(20.1%, 53.3%), 의회(21.2%, 52.9%) 등으로 나타난다. 같은 항목들을 스웨덴에서 살펴보면, 가족(0.3%, 0.6%), 이웃(5.0%, 12.0%), 경찰(3.9%, 16.5%), 법원(4.3%, 17.1%), 중앙정부(10.3%, 28.3%), 노동조합(9.4%, 34.0%), 정당(9.3%, 45.8%), 의회(6.7%, 31.2%) 등으로 한국과 차이가 난다. 가족이라는 공간을 넘어서는 순간 타인 혹은 공적기관에 대한 신뢰는 급속히 떨어지는 것이다.)18

2. 새로운 발전모델: 민주주의 확산에 따른 혁신경제

1) 민주적 경제운영의 3대 원리

그동안 우리는 아주 바쁘게 달려왔다. 뜨거운 중동에서, 구로?울산?포항의 공단에서 굵은 땀을 흘렸었다. 그러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은 놓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그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 경제사회는 불평등하며, 권력은 무능한 대한민국의 현실인 것이다. 항간에 회자되는 ‘헬 조선’이라는 말 속에는 새로운 신분사회에 대한 원망,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진 한국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제 그만 과거의 산업화 모델과 결별해야 한다. 승자독식의 재벌주도 성장, 권위주의적 관치, 재벌기업의 제왕적 의사결정, 군대식 일사불란한 실행력은 자유로운 사고실험과 창조적 혁신의 숨통을 죄고 있다. 수도권 중심의 성장은 지역의 다양한 가능성을 죽이며 결국 나라 전체의 혁신역량을 하락시키고 있다. 더 이상 과거의 산업화 방식으로 문제를 풀 수는 없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권위주의가 동거하는 과거의 모델에서 이제 그만 탈피해야 하는 것이다. 21세기 디지털혁명이 예고하는 새로운 사회는 한국의 모든 경제사회 주체가 보다 다양하게 참여하고, 연계되며 협력할 때 도달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민주주의에 있다. 민주주의의 원리를 경제정책에도 전면화 시켜가는 것이다.

민주적 경제운영원리의 첫째는 ‘참여와 공정’이다. 참여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생산요소가 참여를 통해 스스로의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참여의 확대가 바로 혁신의 시작인 것이다. 공정함은 참여를 이끌어내는 기반이다. 특권층의 승자독식으로 대다수 사회구성원이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히 만들어야 하며 강고한 경제사회의 특권구조를 타파해야 한다. 중산층을 재건시키고 미래를 향한 희망의 사다리를 건설해야 한다. 민주적 경제운영원리의 둘째는 ‘연계와 협력’이다. 다양한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는 구도, 이것이 21세기형 경제사회혁신의 근간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소위 생태계라고 부른다. 벤처생태계, 사회혁신생태계, 정책생태계 등 다양한 생태계를 논의하는 이유는 그 시스템의 성과가 참여와 연계, 그리고 협력을 통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민주적 경제운영원리의 셋째는 ‘혁신과 책임’이다. 참여와 공정, 연계와 협력은 결국 한국경제사회의 모든 영역을 혁신시켜 우리사회의 가능성을 최대화 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그것이 우리의 가능성(potential)을 실현시키고, 우리 국민들의 삶을 편안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을 ‘책임’(accountability) 있게 수행할 수 있는 정부와 사회를 만드는 것, 이것이 앞으로의 최대 정책과제다. 정리하자면 ‘공정’은 ‘참여’의 기반이다. ‘참여’, ‘연계’, ‘협력’은 ‘혁신’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그것을 ‘책임’있게 수행하는 것, 그것이 새로운 경제정책의 내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낮은 곳에서부터의 연대와 혁신

할 일도 명확하다.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우리경제의 목표, 수단, 운영방식을 모두 바꾸는 것이다. 첫째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람을 위한 경제라는 당연한 사실이다(과제①: 사람중심경제). 복지는 사람에 대한 투자며, 경제적 평등과 정치적 자유는 사람 경쟁력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1960~80년대를 통해 경제적 성장과 평등을 동시에 이룩한 나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OECD 국가 중 가장 ‘불공정’하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는 적극적 복지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정의(justice)이며 혁신의 기반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민주적 경제는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과감한 권력이양을 통해서 가능해진다(과제②: 중앙?지방 혁신). 참여를 통한 혁신이 벌어지는 공간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이며, 지방으로의 권력이양만이 지역주민의 자기결정권을 확대시키며 참여를 통한 새로운 활력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분권의 장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지방분권은 거대한 관료국가 대한민국을 뿌리부터 바꾸게 한다. 경제와 복지정책의 구상 및 실행권한의 상당 정도가 기초 혹은 광역지자체로 넘어간다면 그리고 정책의 결정 및 실행과정에서 시민참여가 상당히 실현된다면 대한민국의 관료체계는 거대하게 전환될 수밖에 없다. 지방으로 상당 정도의 권력이 이양되는 것을 아주 극단적으로 사고한다면 한국의 중앙부처는 재정과 조직권한을 가진 기획재정부와 행정자치부 이외에는 필요가 없어진다. 노동, 복지, 산업 등 기획과 조정기능만을 가진 위원회 혹은 청(廳) 정도로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외교, 안보, 대외통상 부처 등은 별개다. 재정과 사무의 지방이양 목표치를 50대 50으로 설정하며, 분권 확대에 따른 지방책임도 강화해야 한다.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을과 기초지자체 주민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마을 주민 스스로 마을경제와 복지의 발전 계획을 세우는 것, 그리고 기초지자체가 각각의 계획을 종합하는 것이 지방 발전의 선결과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지방자치의 형태도 지역민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가칭)지방발전법의 제정, 지방자치법의 전면 개정까지 포함한 새로운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셋째로 필요한 것은 관(官)에서 민(民)으로 권력이양이다(과제③: 시민참여의 공간 확대). 우리는 노동하고 소비하는 단순한 호모에코노미쿠스가 아니다. 때로는 무상노동의 자원봉사자이며 좋은 일에 대한 기부자이기도 하다. 지역사회 속에 존재하는 각종 선의의 자원들이 통상적인 경제활동과 잘 어울렸을 때 우리는 살 만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청년들의 혁신적 참여를 독려하는 KoreaCorp(미국의 AmeiCorp) 구상, 시민사회의 투명성 확대를 위한 시민공익위원회법(영국의 Charity Commission), 사회적경제 관련 정책의 통합적 관리를 위한 사회적경제기본법 등은 모두 다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들인 것이다. 이러한 정책체계가 잘 정비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넷째는 ‘밑’으로부터의 새로운 경제혁신이 필요하다(과제⑤: 내발적 혁신경제). 멀리서 보면 한국경제는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화려한 모자이크다. 그들의 활기찬 혁신과 성장이 한국경제의 미래로 인식된다. 하지만 ‘국가’가 아니라 ‘마을’이라는 안경을 통해 이 땅을 바라보면 대한민국은 너무 넓고 다양한 공간으로 변한다. 마을은 대도시의 한가운데, 변두리의 뒷골목, 산과 들에도 존재한다. 군·구 단위일 수도, 읍·면·동 단위일 수도 있다.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려 하는 것은 한국경제를 구성하는 기초단위 하나하나에서 새로운 혁신의 경로가 설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지금 빠져있는 양극화와 이중구조의 강고한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혹자는 자본이 없는데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자본은 은행의 뭉칫돈, 중장비와 첨단 시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을 자투리땅, 노인정 귀퉁이, 방과후 텅 빈 교실 등도 제대로 활용된다면 훌륭한 자본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실현시킬 사람들의 조직이다. 대기업만이 아니라 중소기업, 골목상권까지 혁신이 확산되는 것, 청년백수, 경력단절여성, 장애인, 고령자까지 참여하는 것, 높은 빌딩과 거대한 산업시설만이 아니라 마을 앞 공터, 동사무소 자투리 공간까지 주민 참여의 새로운 활동공간으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혁신경제인 것이다.

 

1) 통계청, 『2017년 출생통계(확정)』, 『장래인구추계 2015-2065년』 참조.

2) 김종걸 등, 『인구구조변화와 지속가능한 행정기능 발전방안』(2015년, 행정자치부 연구보고서).

3) IMF, Country Report: Republic of Korea, 2018.2

4) 사실 현행법의 틀 안에서도 재벌에 대한 견제는 상당히 가능하다. 재벌의 불공정거래, 권력승계를 위한 불법행위에 대해 철저한 실형위주의 법집행만 이루어져도 불법행위는 상당히 근절될 수 있다. 그러나 좌파·우파 정부의 정권교체에 따라 사법부의 판단이 상당히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은 별로 미덥지 않은 일이다.

5) 공정거래위원회, 『시장구조조사』(2015년 기준) 제7장 참조.

6)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현대경제연구원, 2008년). 크루그먼 책의 원 제목은 The Conscience of a Liberal이다. 원래대로 한다면 ‘자유주의자의 양심’ 혹은 ‘민주당원의 양심’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적당했을 것이다.

7) 프란체스코, 『복음의 기쁨』(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3월).

8) OECD, How’s Life In Korea, 2017.11.

9) OECD,Economic Surveys: Korea, 2018.6.

10) 노인기초연금은 70%의 노인들에게 2018년 9월 25만원 지불되고, 2021년에는 30만원으로 증액이 예정되어 있다. 이것에 의해 정부는 노인빈곤율은 42%까지 줄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 수준은 여전히 OECD 평균의 3배 이상 높은 수치다. 빈곤으로 인한 노인 자살률도 높아서 2014년 노인 자살률이 인구 100,000명 당 55명으로 OECD 평균 22명을 훌쩍 뛰어넘는다.

11) 한국의 세금부담률이 낮으며 그것도 극히 간접세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음은 유종일·정세은, 소득세 최고세율 50%로 부자증세를?(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Issue Paper 제1호, 2013년 9월) 참조.

12) OECD Income Distribution and Poverty (database), Social Expenditure Statistics (database), World Bank GDP per capita PPP(database).

13) Chalmers Johnson, “Japan: Who Governs? An Essay on Official Bureaucracy”, Journal of Japanese Studies, 1975.8.

14) World Bank, The East Asian Miracle: economic growth and public policy, 1993.9. 제2장 참조.

15) 함재봉, 「아시아적 가치논쟁의 정치학과 인식론」(이승환 외, 『아시아적 가치』, 전통과 현대, 1999년).

16) 사회보장사업이란 사회보장영역(보지, 보건의료, 교육, 고용, 주거, 문화, 환경)에서 ‘복지’를 목적으로, 대상자에게 직접급여 및 서비스제공사업과 대상자가 이용하는 시설의 지원사업을 말한다. 총 360개 사업(총예산 110조원) 중 특수목적사업 70개(보훈대상 및 새터민 등), 의료급여 등의 사업 25개를 제외한 총 265개 사업의 유사중복성을 검토한 것이다. 지자체 사업은 자체자원 100%(민간기부금 제외)의 사업으로서 15개 기초지자체에 대한 샘플조사였다. 총 678개 사업(1개 지자체 평균 45개)의 총예산은 1594억원이었다. 자세히는 강혜규 등, 『사회보장사업 실태조사 및 유사·중복사업의 조정방안 연구』(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정책보고서, 2015년).

17) 현대경제연구원의 작업은 너무 크지 않은 질적, 양적지표를 사용하여 한국의 사회자본의 크기를 잘 분석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현대경제연구원, 『OECD 비교를 통해 본 한국 사회자본의 현황 및 시사점』, 2014.5.23.일. 세계에는 상당히 많은 사회자본 관련 데이터셋이 존재한다. OECD에서는 유럽연합의 지원으로 사회자본에 대한 대규모 연구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여기서는 사회자본을 ①사적 관계, ②소셜네트워크 지원, ③시민참여, ④신뢰와 협력의 규범으로 나누고, 전 세계에서 이용 가능한 50여개의 데이터셋에 대해서 정리하고 있다. Katherine Scrivens, Conal Smith, Four Interpretations of Social Capital, OECD Statistics Working Papers, 2013.6 참조.

18) World Value Survey의 South Korea(2010), Sweden(2011) 결과물 참조.http://www.worldvaluessurvey.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