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으로부터의 연대와 혁신(4): 협동조합: 이상을 향한 현실주의자의 기획 (주1)

 

김종걸 한양대 글로벌사회적경제학과 교수

1. 거리의 버림받은 자들

협동조합은 지극히 ‘근대적’이며 또한 ‘전통적’이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에서 천명한 협동조합의 가치 중 “자조, 자기책임, 민주주의, 공정”은 근대 시민혁명이 추구했던 가치였다. 그리고 근대사회의 또 다른 축인 자본주의와도 어울린다. 그러나 이어서 강조되는 “평등, 연대”는 근대 시민혁명이 전파한 가치였으나 자본주의와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

협동조합에서의 ‘평등’이란 단순한 기회의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다 실질적인 평등을 말하며 그것을 뒷밭침하는 가치가 바로 ‘연대’인 것이다. 근대적 자유와 인권의 토대 위에 자본주의가 부셔버렸던 공동체적 평등과 연대의 가치를 되살린 것, 이것이 바로 협동조합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사고방식이 가능했던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 자본주의의 발생 초기로 이야기를 돌려야 한다.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자본가와 노동자, 이 2가지 범주가 역사 속에서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니었다. 신분질서와 자급자족을 기반으로 하는 서양의 중세봉건제도는 이미 14-5세기경에는 상당히 무너지고 있었다. 나라마다 차이는 있으나 가장 선진적이었던 영국에서는 이미 14세기에 전형적인 농노제가 거의 붕괴되었다. 이후 상업의 발전, 농민층분해, 상층자영농의 성장, 자본가의 등장 등과 같은 과정을 거쳐, 봉건제는 시민혁명에 의해 최후의 종말을 맞게 된다.

이 과정은 목가적이며 평화로운 과정이 아니었다. 농촌에서는 수많은 농민들이 경작지와 공유지를 상실하고, 일부 귀족, 상층농민, 상인들의 손에 넘겨지는 과정이었다. 중세의 농촌에서는 농노, 자영농, 농업노동자 등 그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공유지’를 이용할 수 있었다. 마을과 경작지 외곽에는 광대한 산림과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으며, 그곳은 공동체 성원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가축을 방목했고 재목이나 장작이나 토탄 등을 조달했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15-16세기의 인클로저 활동에 의해 공유지에 대한 ‘폭력적 약탈’은 계속되어갔다. 토마스 모어(Tomas More)가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비판했던 바로 그 시절이었다. 농촌공동체의 파괴, 즉 공유재산의 파괴과정은 비단 영국에서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전파되는 곳,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일본, 한국을 막론하고 그 곳에는 농촌에서의 광대한 사유화가 진행되어 갔다. 이에 따라 생활기반을 잃어버린 농민들이 무일푼의 벌거벗은 몸으로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로써 ‘노동자’란 범주가 역사 속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주2) 과거의 농촌공동체는 마을주민 모두가 함께 일하고, 함께 즐기고, 서로 돕는, 노동과 생활의 공동체였다. 그 속에 있을 때에는 누구나 최소한의 생존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에덴’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몰려간 도시란 예술의 향기로 넘쳐나던 중세도시와는 너무나 차이가 났다. 소음과 매연, 불결한 주거시설로 가득 찼으며, 그 조차도 무일푼의 노동자들에게는 사치스러운 곳이었다.

2. 자본주의의 축적방식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가란 이윤율을 최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다. 자본가 개인이 인격자인지 탐욕자인지는 상관이 없다. 자본가를 묶고 있는 사슬이 금(金)이고, 노동자의 그것이 철(鐵)일지라도 자본주의 하에서 묶여있는 것은 양쪽 다 마찬가지다.

치열한 경쟁압박 속에서 자본으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좀 더 엄중한 상황을 의미한다. 낮은 이윤율이란 경쟁압박 속에서 생존하기 어려운 자본가의 위치를 나타낸다. 높은 이윤율이란 경쟁력의 탁월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자본가는 당연히 이윤율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윤율이란 무엇일까. 이윤이란, 매출액에서 투입요소비용을 모두 제한 후 남는 부분, 즉 잉여를 의미한다. 이윤율이란 그 이윤을 총자본재의 가치로 나눈 값이다. 그렇다면 이윤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까. (주3)

r = (Y-W) / K

r: 이윤율, Y: 순생산물가치, W: 임금비용, K: 자본재가치

이윤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첫째는 생산물가격이다. 가격이 비싸지면 당연히 이윤율은 높아진다. 둘째는 노동생산성이다. 노동생산성은 노동의 강도와 노동의 효율에 영향을 받는다. 노동의 강도란 같은 시간에 더 많이 노동하는 것을, 노동의 효율이란 노동절약적인 기계가 도입되어 노동시간당 생산량은 증가하는 경우를 말한다. 셋째는 임금비용이다. 시간당 임금이 올라가면 당연히 이윤율은 떨어진다. 넷째는 설비가동률, 원료 및 기계투입률 등이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여 가동률을 높이고 원료 및 기계의 효율성을 증가시키려는 노력은 당연히 이윤율 증가로 귀결된다.

적어도 자본주의 초기단계에 있어서 이윤축적의 작동원리는 자본가에게 아주 유리한 방식으로 야만적으로 작동됐다. 급속한 인구증가, 아동노동의 사용 등은 성인노동의 임금을 억제해 갔다. 새로운 기계의 도입으로 노동강도와 노동효율은 높아져갔다.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는 움직임이 빨라져 노동자는 항상 실업의 위기에 빠져있기도 했다.

당시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노동자의 보호수준이 높았던 영국의 1833년 공장법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었다. “하루 노동시간은 아침 5시30분에서 저녁 8시까지이며, 이 15시간 범위 안에서는 미성년자(13세부터 18세까지)를 12시간까지 고용할 수 있다. 9세 미만의 아동고용은 불법이며, 9세 내지 13세 아동의 노동은 하루에 8시간으로 제한한다.” 이후 1844년, 1847년의 개정에 의해 아동에 부녀자가 추가되고, 12시간 노동이 10시간으로 줄어들었으나, 18세 이상 성인남자노동자에 대한 그 어떠한 노동보호도 규정하고 있지 않았다. (주4)

로치데일 협동조합이 설립되던 당시의 노동자의 생활은 너무나도 열악한 것이었다. 엥겔스(F. Engels)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들은 맨체스터와 그 주변에서 일하는 35만명 거의 대부분이 습기 차고 불결한 작은 집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이러한 환경에서는 인간적인 모든 것들이 박탈당하고, 도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짐승 수준으로 퇴화한 인종만이 집이라는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주5)

로치데일 지역구의 샤먼 크로포드 의원은 1841년 9월 20일 하원의 토론에서 또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로치데일에서는 136명이 1주일에 6펜스, 200명이 10펜스, 508명이 1실링, 855명이 1실링 6펜스, 1,500명이 1실링 10펜스로 생활하고 있다. 담요가 없는 사람이 80%가 넘었고, 85세대는 집에 이블 한 장 없다. 덮을 것 하나 없이 왕겨 침대만으로 생활해야 하는 집이 46세대나 되었다.” (주6)

공장주는 자본을 가지고 있으며 상인은 상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에게는 가난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들은 가난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자본으로부터 노동으로, 기계로부터 사람으로,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그 근본부터 전환하는 작업, 바로 협동조합의 시작이었다.

3. 로버트 오언과 이상주의

영국에서 협동조합의 선구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일 것이다. 산업혁명과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난 오언은 크게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10살 때부터 런던으로 건너가 잡화상에 취직하여 부모의 도움 없이 생활을 시작했다. 20살에는 이미 직원 500명의 랭커셔 최대의 방적공장에서 지배인(경영자)로 일했다. 30살이 되던 1800년에는 장인이 경영하던 직원규모 2,500명의 대규모 방적공장을 다른 2명의 공동 경영자와 함께 인수했고, 이후 25년간 경영했다.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바로 이 스코틀랜드 뉴 라나크 공장에서의 실험이었다. 그는 노동시간 단축(10시간30분), 10세 이하 노동의 제한, 주택, 생필품 매점, 탁아소, 유치원, 학교 및 도서관의 제공 등 자본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으로 공장을 운영하려 했다. 그에게 있어서의 고민은 사람중심경영의 비효율성 문제가 아니었다. 효율적 직무편성, 공정한 성과목표 등과 결합한다면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내지 않고도 충분히 높은 이윤율 실현은 가능했다.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은 다른 2명의 공동경영자와의 갈등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오언이 실현하는 높은 이윤율에는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오언은 공장의 성공과 함께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갔다. 1815년에서 25년 사이 유럽각국에서는 왕족과 귀부인들, 실업가와 작가들, 성직자와 개혁주의자 등 2만여 명이 뉴 라나크 공장을 방문했다. 그 중에는 멀리 제정 러시아의 황태자도 있었다. (주7)

여기서 끝났다면 오언은 “친절한 오언 씨”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후세까지 이어지는 사회주의자 오언의 명성은 그 다음 행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언은 크게 한발 더 내질렀다. ‘단결과 상호협동의 마을’(village of unity and mutual cooperation) 구상이었다. 이 구상은 1821년 스코틀랜드의 라나크 주에 제출한 보고서, 『대중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 라나크주에 보내는 보고서』(Report to the County of Lanark)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가 꿈꾸던 것은 인구 1,200명 정도의 자치공동체였다. 그곳은 농업과 공업이 함께 존립하는 자립공동체였으며, 공동으로 노동하고 소유하는 사회주의 공동체였다. 계급과 착취가 존재하지 않고, 생산물은 필요에 따라서 모두에게 분배되는 ‘유토피아’ 사회였다. 이러한 협동공동체가 사방에 생겨날 수 있다고 오언은 생각했다. 그는 하나의 협동공동체가 그 옆의 협동공동체와 연대하고, 그 연대의 망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세계를 꿈꿨다. 당시의 많은 영국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오언도 점진적인 개혁에 의해 사회주의가 달성된다고 보았다. 특히 교육과 참여에 의해 인간은 변화된다고 확신했다. 그의 저서 『사회에 관한 새로운 견해』(A New View of New Society, 1813-14)의 첫 번째 논문은 바로 ‘성격형성의 원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협동공동체라는 환경의 변화가 인간의 변화를 가져오고 결국은 새로운 도덕 사회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언의 이상은 당시 협동조합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어 1825-32년 사이 영국에서는 오언의 이상에 영감을 받은 협동조합이 400개 정도 탄생했을 정도였다. (주8)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같은 공장 내에 근무하는 2500명에 대한 ‘관리’의 성공이 마을, 그리고 지역과 세계로 퍼져가기에는 인간의 탐욕과 반목의 힘이 너무나 강했다. 오언의 협동공동체는 영국에서조차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떠났다. 작은 아들에게 뉴 라나크 공장을 맡기고 큰 아들과 함께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는 미국 인디아나주에 뉴 하모니(New Harmony)라는 협동공동체를 만들었다(1824년). 그러나 3년 만에 뉴 하모니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가고 오언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어중이떠중이 다 몰려들었으며(실제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800명 중 11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회원들이 주거할 집도 마련할 수 없었다. 그곳은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몰려든 천사와 뱀이 공존하는 마을”이었던 것이다. (주9)

뉴 라나크 공장에서의 작은 성공경험을 절대화했던 그는 인간에 대해 너무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수성가한 사람 특유의 고집일수도 있다. 마르크스에게 오언은 참 나이브하게 보였을 것이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사회주의란 역사적 필연성이었다. 생산력, 생산관계, 생산양식으로 이어지는 그의 사적(史的) 유물론 체계는 변증법이라는 논리학의 무기를 장착한 거대하고 치밀한 기계와 같았다. 그래서 그는 같은 사회주의라도 오언을 ‘공상적’이라고 비하하고, 자신의 이론을 ‘과학적’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주10) 그러나 역사는 항상 복잡한 반전을 준비한다. 자본주의는 ‘과학적’으로 멸망하지 않았다. 레닌의 제국주의론 혹은 그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에 의해서 발전되어 온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논리도 결국은 파탄되어 갔다. (주11) 아무튼 오언의 실패는 협동조합 운동에 있어서도 커다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바로 로치데일 협동조합과 같은 현실주의자들의 등장이다.

4. 로치데일 협동조합과 현실주의

1844년 10월 24일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The Rochdale Society of Equitable Pioneers)이름으로 사업등기를 낸 로치데일의 직공들은 그해 12월 21일, 좋은 장소라고는 전혀 말할 수 없는 토트레인(두꺼비거리)의 한 창고 1층을 빌려 소박한 매장 하나를 개설했다. 그 때 취급된 물품은 밀가루, 버터, 사탕, 오트밀에 불과했다. 이들의 시작은 미약했으나 앞으로의 계획은 창대한 것이었다. 이들은 ‘1구좌 1파운드’의 출자에 의해서 자금을 조달하고 앞으로 다음과 같은 사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1) 식료 및 의복 등을 판매하는 점포의 개설.

2) 조합원의 생활개선을 위해 다수의 주택을 구입 혹은 건설.

3) 실업 및 저임금에 시달리는 조합원에게 안정된 고용을 제공하는 물품의 생산.

4) 더 많은 혜택을 조합원에게 주기 위해 토지를 구입 혹은 임차해서 조합원이 경작하게 함.

5) 자급자족의 국내식민지(협동마을)를 건설하고, 이를 건설하려고 하는 다른 조합을 지원.

6) 금주(禁酒)보급을 위해 금주호텔을 개설.

위 내용을 보면 로치데일의 설립자들에게 있어서도 오언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협동공동체를 만들려는 움직임은 적어도 19세기 후반 영국의 협동조합운동가들에게 있어서는 공통된 목적이었던 것 같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최대 관찰자이자 선전자였던 홀리요크의 저서의 제14장에는 초기멤버 28명의 경력이 나와 있다. 2명을 빼고는 다 사회주의자(오언주의자), 인민권리주의자(차티스트)였다. (주12) 당연히 이들의 계획이 ‘매장’ 하나 개설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협동조합운동의 지도자였던 윌리엄 킹(William King, 1786-1865)도 이러한 운동방침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편집하고 발간했던 잡지, ‘협동조합인’(The Co-operator)의 제6호에서 로치데일 협동조합이 천명했던 사업방향의 거의 모든 사항을 이미 이야기한 바 있었다. 출자금의 축적→공동구입/점포경영→이윤축적/공동자본형성→생산조합→협동공동체라는 경로로 협동조합은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13)

어려움은 적지 않았으나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협동공동체 구상만 빼고는 거의 모든 사항을 실현시켰다. 단순한 소비조합에서 벗어나 생산조합(밀가루 생산, 방직/모직물생산의 2개 조합)으로 확대시켰으며, 토지/주택조합, 질병/장례조합 등과 같은 복지조합도 운영했다. 본체인 소비조합의 규모도 급속히 성장했다. 개설당시 조합원 수는 28명, 자본금은 28파운드에 불과했다. 10년 뒤 1855년에는 조합원 수 1,400명, 자본금 11,032 파운드, 매출액 44,902 파운드로 증가했다. 19세기가 끝나가는 1891년에는 조합원수 11,647명, 자본금 370,792 파운드, 매출액 296,025 파운드로까지 확대됐다.

이러한 성공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필자는 로치데일 협동조합이 견지했던 ‘현실주의’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장기목표(협동공동체의 건설)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지 않았다. 이상주의 혹은 급진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로치데일의 ‘선구자’들은 조합원에 대한 금전적 이득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조합 최초의 이사 중 하나였던 스미시스(James Smithies)는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조합원의 상태가 나아지고 있는 것은 그들의 차림새나 태도 그리고 자유롭게 하는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협동조합에 참여함으로서 그들 속에서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운동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조차, 우리들이 자본가가 되는 것에 너무 많이 의지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노동자 계급 속에서 16년 동안 겪은 나의 체험으로부터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적을 향하여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려면 황금이란 끈, 그것도 자신들이 직접 만들어낸 끈으로 노동자를 묶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14)

“황금이라는 끈”은 오언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한 면에서 오언은 이상주의자였다. 오언도 소비조합을 운영했었다. 그러나 이윤은 배당하지 않았다. 미래투자(협동공동체)를 위한 부(不)분할 내부자금으로 축적했었다. 그러나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달랐다. 그들은 매장을 이용하면 할수록 더욱 이득이 되도록 이용실적배당 원칙을 천명했다. 이용실적배당 원칙은 이윤분배에 있어서 인적요소와 이용자 인센티브를 적절히 혼합한 절묘한 해결책이었다. 출자금 중심으로 배당원칙을 정했다면 그것은 기존의 주식회사와 다를 바 없어진다. 인적결사체로서의 성격을 갖추려면 당연히 출자금의 이자 및 배당의 제한을 설정해야 한다. 이들은 이용실적배당을 무기로 소비조합을 성장시켜 갔다. 그리고 이후 생산조합, 복지조합 등으로 협동조합의 외연을 확대했다. 그러나 오언류의 협동공동체까지는 가지 않았다. 공동집합생활의 성격이 강한 협동공동체는 이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채택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었다. 이들은 지역사회를 협동조합의 경제원리로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community cooperative)으로 운동의 방침을 바꾸려했다. “매장운영, 생필품제도, 공제 및 은행, 주택건설, 농장사업에 착수하면서 지역주민의 경제생활이 ‘CO-OP’를 통해 돌아가는 것에서 새로운 사회의 맹아를 발견”했던 것이다. (주15)

로치데일의 선구자들이 미래를 위해 준비한 것은 협동공동체를 위한 ‘자금’이 아니었다. 협동하는 ‘사람’이었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에서는 전체 수익금 중 관리비, 차입금이자, 고정자산의 감가, 출자금에 대한 배당, 사업확장을 위한 내부적립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의 2.5%를 교육기금으로 항상 적립해 두었다. 순이익의 2.5%는 교육에 투자했던 것이다. 1862년 면화기근이 극심하던 그 때에도 ‘선구자협동조합 연감’에는 교육투자에 대한 자랑으로 넘쳐났다. 토트레인 8번지에 있는 도매창고에는 교육을 위한 중앙사무공간을 설치했다. 도서실 장서가 5,000권으로 늘었고, 귀중한 저작을 갖춘 참고도서실을 별도로 마련했다. 일간지 14개, 주간지 32개, 각종 월간지와 <쿼털리 리뷰>를 포함한 중요한 매체는 모두 갖추었다고 자랑했다.

홀리요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합원들은 주머니가 텅 비었어도 얼마든지 정신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 통찰력과 분별력을 키워주는 지식을 얻는 일은 숫자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엄연히 경제적인 것이다”고 말이다. (주16) 확실히 교육을 통한 지식 및 교양의 축적은 협동조합원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발전하기 위한 주원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히 “경제적 경쟁력에 도움을 준다는” 협소한 의미가 아닐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지식인들이 거의 그랬듯이 그들도 인간이성에 대한 낙관적인 신뢰감으로 꽉 차 있었다. 교육을 통한 인간이성의 발전, 그 기반 위에 달성되는 점진적인 개혁, 이러한 낙관론은 빅토리아 시대 지식인들의 최대 교의(敎義)였다.

또 하나 강조해야 할 것은 로치데일의 ‘선구자’들은 그 이전에 산재되어 있었던 협동조합들의 운영원리들을 종합하고 실천했다는 점이다. 로치데일의 원칙, ①민주적 운영, ②문호개방, ③출자금에 대한 이자제한, ④이용실적배당, ⑤현금거래, ⑥정직한 판매, ⑦교육촉진, ⑧정치적 종교적 중립 등의 원칙은 이미 기존의 여러 협동조합에서 일부 운영되던 원칙이었다. 민주적 운영은 차티스트운동의 기본 이념이었으며, 문호개방과 이자제한은 많은 협동조합에서 이미 실시되던 원칙이었다. 현금거래는 윌리엄 킹 등 협동조합 지도자들이 너무나도 강조했으며, 이용실적배당 또한 다른 곳에서 이미 실시된 바 있었다. 그러나 로치데일 협동조합에서처럼 철저히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협동조합으로서의 정체성 유지와 현실적인 경쟁력 확보를 위한 운영의 원칙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 기반 위에서 실제 협동조합의 경영에 성공했다. 그러한 차원에서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근대 협동조합운동의 효시라 말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5. 현실을 딛고 이상을 향하여

로치데일 원칙은 현대 협동조합의 기본원칙에도 그대로 유지된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은 1995년 9월 맨체스터 대회에서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을 채택하고 협동조합에 대한 정의와 가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소유하며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사업체를 통하여 공통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필요와 바람을 충족하고자 자발적으로 연대한 사람들의 자치 조직”으로 정의된다. 이 조직은 “자조, 자기책임, 민주주의, 평등, 공정, 연대의 가치를 기초로” 하며, “각 창설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협동조합의 조합원은 정직, 공개, 사회적 책임,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윤리적 가치를 신조로 삼는”다고 설명되고 있다.

협동조합의 가치와 행동체계를 정비하려는 ICA의 노력은 지금까지 크게 3차례에 걸쳐서 정식화되어 왔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80년의 ‘레이들로 보고서’일 것이다. 1980년 ICA 제27차대회(모스코바)에서 캐나다의 레이들로 박사는 협동조합이 ‘신뢰성의 위기’, ‘경영의 위기’를 극복해 왔지만 상업적 성공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져서 협동조합으로서의 정체성이 없어지는 것과 같은 ‘사상적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비판했다. (주17) 또한 지금까지의 협동조합의 6원칙이, ①현행의 관행을 원칙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점, ②소비자협동조합에 치우쳐 농업협동조합, 노동자협동조합, 주택협동조합 등 다른 종류의 협동조합에 똑같이 적용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레이들로 보고서 이후에도 선진국의 협동조합은 단순히 ‘사상적 위기’만이 아니라 ‘경영의 위기’, ‘신뢰성의 위기’가 더욱 촉진되어 갔다. 1980년대를 통해 유럽의 몇몇 거대 생협 조직이 도산했으며, 일부는 주식회사로 형질변경 했다. (주18) 이러한 상황에서 협동조합의 원칙을 재정립하려는 노력의 결과 발표된 것이 현재의 ‘협동조합 7 원칙’이다. 필자는 이 원칙들이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그 경쟁력을 최대화 시킬 수 있도록 구성된 원칙들의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면에서는 로치데일 원칙의 기본정신과 전혀 차이가 없다.

키워드는 바로 ‘사람’, ‘협력’, ‘지역’이다. 개인이 잘났으면 혼자 살면 되지만 대개는 돈도 능력도 부족하다. 돈과 사람을 모으는 방식 중 돈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 바로 협동조합이다. 서로 십시일반으로 사업하고(제1원칙, 자발적이고 개방적인 조합원제도, 제3원칙, 조합원의 경제적 참가), 함께 결정하고(제2원칙, 조합원의 민주적 통제), 열심히 공부하고(제5원칙, 교육 훈련 및 정보제공), 다른 협동조합과 협력하며(제6원칙, 협동조합들 사이의 협동),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제7원칙, 커뮤니티 관여)하는 것이다. 협동조합의 제4원칙(자율과 독립)은 앞에서의 원칙을 방해하는 그 어떤 외적인 압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함을 역설한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했을 때 그들의 경쟁력이 더욱 강화된다는 경제이론은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사람은 당근(인센티브)과 채찍(디스인센티브)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감동(감성)과 윤리적 결단(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적어도 평균적인 경영학자라면 인적자원중시의 경영전략이 상당히 경제 합리성을 가진다는 수많은 이론과 사례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오언의 뉴 라나크 공장에서의 실험,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성공이 그랬다. 그러한 면에서 사람중시전략이 경제 합리성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경제학적 주장이 아니라 정치적 선동일 뿐이다. (주19) 협동조합간 협력, 그리고 커뮤니티에 대한 관여도 시장에서의 시장거래비용을 줄이며, 지역에서의 협동조합 경쟁력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한 면에서 협동조합 7원칙은 협동조합으로서 성공하기 위한 지극히 ‘현실적’인 최소한의 원칙일 뿐이다. (주20)

그러나 과연 이것으로 협동조합의 역할은 다하는 것일까? 협동조합이란 ‘성서의 창세기’는 28명의 로치데일의 직공들이 써 내려간 것이었다. 그 ‘묵시록’은 협동공동체 그리고 협동세상의 건설일 것이다. 그러나 협동조합이 협동사회로 이어지는 경로는 너무나 멀고 아득하다. 레이들로 박사는 1980년의 보고서에서 협동조합 지역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별) 협동조합 단독으로는 주류 경제시스템과 사회질서에 실질 변화를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다양한 협동조합과 협동조합에 속한 조직 모두를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협동조합 지역, 협동조합 세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모든 운동에는 3가지 기본요소가 있어야 한다. 비판과 대안, 그리고 이행방법이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적 경제운영방식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다. 협동조합 ‘선구자’들의 최고의 대안은 사회전체가 협동사회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행방법은 모든 경제를 협동조합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협동조합 사업체들의 운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난점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협동조합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그 영역은 아무리 많이 잡아봐야 국내총생산(GDP)의 10% 미만일 것이다. 그것도 20~30년 열심히 노력해서 달성할 수 있는 결과다. 한국사회의 사례에서 본다면, 우리에게는 비정규직, 부동산, 교육, 의료문제 등 시급한 문제가 아주 많다. 협동조합이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과 제도와 정책을 바꿔야 하며, 그것은 대개 ‘정치의 몫’이다. 비록 한국에서 정치가 블랙홀과 같고 주요 갈등의 원천을 제공한다 할지라도, 정치가 가지는 가능성에 눈감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영국의 협동조합운동은 영국식 사회주의운동, 페이비언 사회주의(Fabian Socialism)와 긴밀히 연동된다. 1844년에 결성된 페이비언 협회는 현존하는 최고의 사회주의 연구 및 활동단체일 것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혁명적 방법에 반대했다. 협회출범 당시 가장 위대한 사회주의자로 추앙받던 윌리엄 모리스가 “노동자들에게는 혁명 외에 희망이 없다”고 말했을 때, 페이비언 협회의 유력인사였던 버나드 쇼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노동자들에게는 진정 희망이 없다”고 맞받아쳤다. 그들은 ‘합법적’이며 ‘점진적’인 방식에 의해 사회주의를 실현하려 했다. (주21) 지방정치로부터 거점을 만들고, 독자적인 정당을 창당하기 보다는 기존의 정당이나 단체에 침투하여 자신들의 개혁정책을 실현하려 했다(‘침투전략’). 합법적 수단, 점진적 방식, 침투전략 등 로치데일 이후 많은 협동조합인들이 고민했던 그 과제는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있다. 협동조합인들의 궁극적 목적은 단순히 개별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잘 사는 협동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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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 원고의 초고에 대해서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의 김형미 소장은 역사적 사실 및 용어정리 등 몇 가지 중요한 오류를 수정해 주었다.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주2) 흔히 이 시기를 경제사에서는 자본주의적 축적에 선행하는 시초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는 시초축적이 정치경제학에서 하는 역할은 “원죄가 신학에서 하는 역할”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태초에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있듯이, 자본가와 노동자가 분화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신학상의 원죄에 관한 전설은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밥을 얻어먹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빠지게 되었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지만, 경제학상의 원죄의 역사는 그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인간들(자본가들)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우리에게 밝혀준다”고 말했다. 마르크스, 『자본론(제1권)』(김수행 번역, 2005년), 979-980쪽.

주3) 이윤율을 결정하는 요인을 간단히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하의 이윤율과 관련된 논의는 사무엘 보울스 등의 논의를 단순화시킨 것이다. Samuel Bowles, etc., Understanding Capitalism: Competition, Command, and Change, 3th 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chap.10 참조. 한국어판으로는 『자본주의이해하기』(후마니타스, 2009년).

이윤율 결정요인 및 영향을 미치는 방향 이윤율을 올리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
1. 산출물의 가격(Pz)(+) - 가격을 올릴 수 있도록 독점력을 획득
2. 시간당 임금율(w)(-)

- 값싼 노동력 획득노력

- 노동조합의 무력화

3. 노동생산성 .
  노동강도(e)(+)

- 생산라인 속도증대

- 작업속도를 통제하기 위한 지휘감독 증대

노동효율(f)(+) - 더 효율적이고 노동절약적인 기술의 도입
4. 자본재 및 중간재 .
  노동시간 당 사용되는 원료 및 기계(m)(-) - 원료의 낭비를 줄이고, 도구의 고장률을 줄이기 위한 새로운 생산방법 개발
원료 및 자본재의 가격(Pm)(-)

- 구매독점의 획득

- 해외자원확보를 위한 진출

설비가동율(u)(+)

- 유휴시설이 가동될 수 있도록 새로운 시장발굴

- 정부의 총수요정책 지지

* 자료: Samuel Bowls(2005)의 251쪽 <표 10.1>를 재구성.

주4) 공장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마르크스, 『자본론(제1권)』, 제10장. 그나마 당시 공장법이라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영국뿐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서론에서 영국과는 달리 뒤늦게 자본주의적 발전을 하는 자신의 나라(독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독일)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의해서만 아니라 그 발전의 불완전성에 의해서도 고통을 받고 있다. 현대의 고난과 아울러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고난(이것은 구태의연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생산방식이 진부한 사회적, 정치적 관계들과 함께 존속하기 때문에 발생한다)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죽은 것에 의해서도 고통을 받고 있다.”

주5) 엥겔스(Engels)의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 G.D.H.콜, 『영국협동조합의 한 세기』, 정광민 옮김, 그물코 출판, 2015년, 31쪽에서 재인용.

주6) 조지 제이콥 홀리요크, 『로치데일 공정선구자 협동조합: 역사와 사람들』, 정광민 옮김, 그물코 출판, 2013년, 156쪽.

주7) 오언에 대한 설명은, 콜의 저서 제2장, 松村善四郞·中村雄一郞、『協同組合の思想と理論』、日本經濟評論社、1985年、11-23쪽, 윤형근, 『협동조합의 오래된 미래: 선구자들』, 그물코, 2013년, 21-56쪽 참조.

주8) 로버트 오언 박물관 (웨일즈 뉴타운 소재) http://robert-owen-museum.org.uk/time_line

주9) 윤형근의 저서, 32쪽.

주10) 역사해석 방법으로서의 사적유물론 체제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경제학비판』의 서문에서 잘 쓰여있다. (K.Marx, 『經濟學批判』, 日本大月書店, PP15-17). “내 연구에 있어서 안내역으로 되는 일반적 결론은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이 정식화 가능하다. 인간은 그들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 있어서 필연적인, 그들의 의지와는 독립된 제(諸) 관계에, 즉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에 직면하게 된다…..이것이 실체적인 토대이며 또한 그 위에 하나의 법률적이며 정치적인 상부구조가 형성되며, 또한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가 대응하게 된다…..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그 발전의 어느 단계에 있어서, 기존의 생산관계와, 혹은 그것의 법률적 표현에 불과한 소유관계와 모순되게 된다…..이때 사회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함께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어떤 때는 서서히, 어떤 때는 급격히 변혁되어 가는 것이다…..하나의 사회구성은 그것이 충분히 포용할 수 있는 생산력을 모두 발전시키기 전에는 결코 몰락하지 않으며 새로운 더욱 발전된 생산관계는 그 물질적 존재조건이 낡은 사회자체의 태내(胎內)에서 완전히 부화되기 전에는 결코 낡은 것을 대체할 수 없다……(이러한 발전과정은) 대체적으로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및 근대 부르조아 생산양식을 거친다…부르조아 생산양식은 사회적 생산과정의 최후의 적대적 형태이다…..따라서 이 사회구성으로서 인간사회의 전사(前史)는 끝나게 되는 것이다”

주11) 자본주의는 멸망하지 않은 이유를 레닌(1870-1924)에게 물어본다면 그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단계로 발전하며 그 생명력을 연장시켰다고 대답할 것이다. 해외로의 상품과 자본수출에 의해 확장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차 세계대전 직전 러시아의 감옥에서 저술된 『제국주의론』은 다가오는 전운은 바로 상품과 자본수출시장, 그리고 원료조달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독점자본 간의 ‘영토의 재분할전쟁’에 불과하다는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레닌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란 언젠가는 전 세계의 땅 끝까지 자본주의를 전파시키고 난 이후에 스스로 멸망할 운명을 가진 존재였다. 따라서 제국주의란 “자본주의 발전의 최후의 단계”로서, “사멸하고 있는 자본주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강했다. 스스로를 변화시켜 간 것이다. 제국주의 단계에 있어서도 자본주의가 멸망하지 않자, 급진파에 있어서 꺼내든 논리 중 하나는 바로 ‘국가독점자본주의’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국가가 재정금융정책을 통해 경제를 불황으로부터 탈출시켜가며, 또한 사회보장 및 공공서비스의 정비를 통해 노동자들의 생활불안을 완화시켜 이를 통해 체제변혁의 세력증대를 억제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의 멸망이란 일종의 묵시록적 예언이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국가형태가 기본적으로 독점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가에 불과하며, 사회보장도 더 큰 변혁을 위한 혁명의 임계치를 높여가는 대증요법에 불과했던 것이다. 北原勇, 『獨占資本主義の理論』、有斐閣、1977년, 레닌, 『제국주의론』, 백산서당, 1988년 등을 참조.

주12) 본고에서의 로치데일에 대한 설명은 기본적으로 홀리요크의 책, 그리고 G.D.H.콜의 책, 松村善四郞·中村雄一郞의 책에 의거.

주13) 윌리엄 킹에 있어서 협동조합을 달성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공동자본을 만들기 위해 매주 6펜스 이상을 출자한다. ②통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출자금을 사용한다. 즉 저축은행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물품거래에 사용한다. ③충분히 출자금이 축적된 이후에는 조합원고용을 위한 제조업투자에 사용된다. ④더 많은 자금이 축적되면 토지를 구입하고 공동생활을 위해 사용한다. 松村善四郞·中村雄一郞의 책, 43-53쪽.

주14) 홀리요크의 책, 119쪽.

주15) 김형미, 「협동조합 선구자들과 ‘협동조합공화국’」, 김창진 엮음, 『협동과 연대의 인문학』, 가을의아침, 2014년, 122쪽.

주16) 홀리요크의 책, 322쪽.

주17) A.F.레이들로, 『21세기의 협동조합』, 염찬희 옮김, 알마출판, 2015년.

주18) 1937년의 ICA 제15차 대회(파리)에서 처음으로 7원칙을 제정했지만 이것은 생활협동조합의 기반을 이루었던 로치데일 원칙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이후 1963년의 23차 회의(비엔나)에서 소련 소비조합중앙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현금거래의 원칙과 정치적/종교적 중립의 원칙을 없앤 새로운 6개 원칙을 채택한다. 1980년의 레이들러 보고서가 중요한 이유는 순조롭게 발전해 왔던 협동조합이 위기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를 통해 프랑스에서는 거대 생협의 통합이 추진되었으며, 1985년 전국 2위의 로렌생협, 3위의 북부지방생협 등 많은 생협이 도산해 갔다. 독일에서도 생협의 주식회사화가 추진되어 결국은 조합원이 존재하지 않은 일반 주식회사로 전환되어 갔다. 미국의 버클리생협도 북미지역 최대의 생협이었으나 1988년 도산함으로서 50여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ICA 원칙의 변화과정은 家の光協會(2011), 『協同組合の役割と未來』 참조.

주19) 경제이론이 어떻게 정치적 선동에 의해서 왜곡되는가는 Paul Krugman,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현대경제연구원북스, 2008년)에서도 잘 정리되어 있다. 원래 영어원서의 제목은 The Conscience of a Liberal 이었다. ‘자유주의자의 양심’ 혹은 ‘민주당원의 양심’ 정도로 번역했다면 더 뜻이 명확했을 것이다.

주20) 협동조합 7원칙이 어떻게 경제합리성을 가지는가에 대한 자세한 논증은 김종걸, 「기업/운동/정치로서의 협동조합」(『생협평론』, 2015년 겨울호) 참조.

주21) 페이비언 사회주의와 관련해서는 조지 버나드 쇼 외, 『페이비언 사회주의』, 고세훈 옮김, 아카넷, 2006년. 특히 이 책의 역사서문에 고세훈 교수는 다양한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의 최대공약수를 훌륭하게 설명해 내고 있다. 사실 이런 점진적 개혁노선은 영국사회의 전통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혁명은 그 과정에서의 유혈과 고통, 파괴적 증오 등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인류사회를 혼돈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생각이 아주 강했다. 영국의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그의 저서, 『사회주의론』(On Socialism)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들(혁명주의자)은 혼돈이 코스모스의 건설을 시작하기에 가장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오랜 기간 갈등과 폭력과 약자에 대한 강자들의 폭군적 압제가 반드시 발생한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혁명이, 홉스에 의하여 만인은 만인의 적이라고 묘사된 상황으로 인류를 몰아넣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밀(Mill)의 인용은 이근식, 『존 스튜어트 밀의 진보적 자유주의』, 기파랑, 2006년, 199쪽에서 재인용. 이근식 교수는 폭력혁명에 대한 밀의 비판들은 밀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라 영국 보수주의의 아버지격인 버크(Edmund Burke, 1929-97)가 그의 『프랑스혁명의 고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1790)에서 지적한 이후 당시 영국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고 말한다. 이근식/황경식/임현진/김종걸, 『협동조합의 필요성 및 발전을 위한 사상적 정책적 고찰』, 기획재정부, 2012년, 1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