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으로부터의 연대와 혁신(3): 민주주의자의 기본덕목

 

김종걸 한양대 글로벌사회적경제학과 교수

1. 플라톤 vs. 아리스토텔레스

까마득한 아테네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인간사 고민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가능성, 민주주의의 성공조건, 민주주의자의 덕목 등은 아테네에서도 항상 고민스런 주제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를 나타내는 용어는 데모크라티아(demokratia), 즉 민중(demos)이 권력(kratia)을 장악하는 것이었다(각주1). 많은 연구들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가 꽤 잘 작동했었다고 전해준다. 모든 시민은 최고의사결정기구인 민회, 민회에 안건을 제기하기 위한 500인 위원회, 그리고 각종 사안을 재판하기 위한 배심원법정에 일상적으로 참가했다. 빈민의 정치참여를 높이기 위한 일당도 지급했다. 정치적 엘리트의 독주를 막기 위해 도편추방제라는 독특한 제도도 운영됐다. 매년 모든 시민의 투표로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정치엘리트를 10년간 추방하는 것이다.

사실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믿지 않았다. 중우정치(populism)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플라톤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가 ‘민중’에 의해 무고하게 사형당한 것(BC399년), 그리고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BC431-404년)에서 귀족정치의 스파르타에게 패배한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플라톤은 시민을 3계급, 즉 평민, 군인, 수호자계급으로 나누고 정치권력은 수호자만이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 최고정점은 도덕적 훈련을 쌓은 철학자였다. 그에게 있어서 정의란 모든 사람(각 계급)이 각자 자기 몫을 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으며, 그 전체를 전지전능한 철인독재자가 지배하는 세상이었다(러셀, 서양철학사, 제14장).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의 장점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정치학』에서 스승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플라톤식 통일성의 추구는 복합체로서의 국가의 본성에 어긋난다는 것이다(각주2).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의 장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다수자(polloi)는 비록 그중 한명 한명은 훌륭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함께 모여 있을 때에는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소수자인 가장 훌륭한 사람들보다 더 훌륭할 수 있다”(정치학 162쪽). 집단지성에 대한 강조였으며,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민중’의 폭주를 염려하긴 했다. 그의 책에는 이에 대한 수많은 걱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 엘리트와 민중 간의 협업(혼합정체)을 강조했다. 중우정치라는 위험에 직면한 민주주의가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은 다음의 2가지였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 구성요소, 즉 정치적 엘리트와 민중이 서로 협업하는 방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이다. 아니면 민중으로부터 권력을 뺏고 능력 있는 정치적 엘리트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사고방식이다.

2. 엘리트와 권력독점

오랜 세월 동안 민중은 양날의 칼날이었다.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동력이기도 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시대의 광기 속에 휩쓸리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와 남경에서의 대학살은 비록 거대한 권력에 의해서 강제되었다고는 하나 말단에서는 순박한 시골청년 한스와 슈미트, 스즈키와 나카무라에 의해서 자행되었을 것이다. 비이성적 집단행동의 유혹은 나약한 개인들에게는 너무나 큰 것이었다. 민중의 비이성적 행동에 대한 염려는 정치적 혹은 경제적 엘리트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명분이기도 했다. 실제로는 사익을 위해서 움직이면서도 그들은 국민을 위하는 양 치장했다. 국민을 선동하고 분열시키며 허황된 공약으로 국민을 기만하면서도 공공의 목적을 위한 것인 양 강변했다.

가장 큰 문제는 엘리트가 국민으로부터 통제받지 않는 권한에 대해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탁월함에 대한 ‘신화’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러한 ‘신화’ 중 하나가 독재정권 박정희의 ‘능력’이다. 박정희 정권이 아니었으면 경제성장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이며, 그 과정 속에 독재도 인권탄압도 모두 정당화된다. 아마티아 센(A.Sen)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 적이 있다. 독재정권이 경제발전에 유익하다는 가설을 확인할 증거는 하나도 없다. 이러한 주장은 “광범위하게 입수 가능한 모든 자료에 기초한 일반통계 검증보다는, 제한적으로 선택된 정보에서 도출된 단발성 경험주의”에 불과하다고 그는 말한다(아마티아 센, 센코노믹스, 139쪽). 한국사회에 횡횡하는 또 다른 ‘신화’ 중 하나는 재벌이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어왔다는 것이다. 이끌어 온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경제위기 때마다 이들에 대한 구제금융은 국민경제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언제나 정당화된다. 사실 재벌과 독재정권이 이 나라를 만든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굵은 땀을 흘렸다. 한 푼씩 모은 돈으로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그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의 기틀이 되었다. 부산과 광주, 광화문과 대학가에서 민주화를 위한 투쟁도 가열하게 벌였다. 그 열망과 함성과 희생이 바로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를 만든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1964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좀벌레의 솜털”이라고 노래한 바 있다. 그렇다. 그 많은 피와 땀과 노력이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뿌리 속에 들어가 지금 우리를 만든 것이다.

3. 민주주의자의 기본덕목

이제 다시 아테네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당시 최고의 정치인이었던 페리클레스(Perikles, BC495-429년)는 그의 유명한 연설(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사자에 대한 추도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테네의 민주정이 “각자 최상의 유연성과 품위를 유지하면서 매우 다양한 형태의 활동에 자신 스스로를 적응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이다. 페리클레스 시대로부터 2300년이 훌쩍 지난 영국에서 민주주의자 밀(J.S.Mill)도 그의 『대의정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통 사람들이 공공문제를 다루는데 서툴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일단 공적인 영역에 들어와 일을 취급하게 되면 그들의 생각이 깊어지고 정신 또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똑 같은 일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류 계층 사람도 공공문제에 관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커지고 안목도 높아진다.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고 들으며 그 자신의 지식도 넓어진다.”(각주3).

엘리트들은 언제나 민중의 가능성을 폄하하려 노력한다. 그들 권력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바꾸어야 한다. 민중의 가능성을 믿고 그들에게 권력을 과감히 이양해야 한다. 민주주의자란 민중의 더 큰 권력 확보를 통해 더 활기차고 더 행복한 나라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때로는 협동조합이 민주주의자들의 거점이 될 수 있다. “자조, 자기책임, 민주주의, 평등, 공정, 연대”라는 협동조합의 가치관은 근대 민주주의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소양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각주4). 때로는 지역에서의 주민운동이 민주주의 확산의 거점이 되기도 한다. 참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개인의 탁월성이 확대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지역과 산업에서 민주주의의 거점을 확대하는 것, 그 거점을 기반으로 진정한 민중(demos)의 권력을 확보하는 것,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자의 최대 덕목일 것이다.

(각주1) 그리스어에서 ‘민중’이란 ①아테네 도시민 전체, ②지도층이 아닌 일반시민, ③최고의사결정기구였던 민회, ④최소 행정단위인 민중공동체(총 139개)를 일컫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2번째 의미, 즉 다수파였던 일반시민(광범위하게 존재하던 빈민)이 최종적인 권력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석은 M.H.Hansen, Die Athenishce Denokratie im Zeitalter des Denosthenes, 千葉眞、『デモクラシ-』, 岩波書店, 2000년, pp.7-8. 이 때 시민은 여성 및 어린이, 노예, 재류외국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약 3만 명 정도의 18세 이상 성인남자에 한정된다(전체인구의 15-20%).

(각주2)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는 복합체에서 통일체가 되어갈수록 파괴되어 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국가란 남녀가 결합된 가정(oikos), 여러 가정으로 구성된 마을(kome), 그리고 여러 부락으로 구성된 복합체를 의미했다. 그리고 인간은 그 복합체를 구성하는 동물(zoion politikon)이라고 규정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정치적 동물 혹은 사회적 동물로 번역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천병희 번역, 도서출판 숲, 제2장.

(각주3) 서병훈, 「좋은 정치, 이상적 민주주의: 현실정치에 묻다」, 자유주의연구회, 2016년6월10일 발제문.

(각주4) 김종걸, 「협동조합은 민주주의의 학교다」, 프레시안, 2016년2월. 원본은 『생협평론』, 2015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