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개방, 관세화냐 현상유지냐
장경호,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 / (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연구위원
쌀 시장 전면개방이 목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난 1993년 우르과이라운드(UR) 농산물협상이 타결되고 1995년부터 세계무역기구(WTO) 농업협정문이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그리고 선진국으로 분류된 나라들은 6년(1995∼2000년), 한국을 포함하여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된 나라들은 10년(1995∼2004년) 동안의 의무이행계획서를 제출했고, 제출된 계획서에 따라 의무를 이행하였다.
한국은 쌀에 대해서만큼은 농업협정문에 규정된 특별대우 조항을 적용하여 관세화 방식 대신에 최소시장접근(MMA) 방식으로 의무를 이행하였다. 관세화를 하지 않는 대신 매년 일정한 물량을 의무적으로 도입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95년 최초 5만 톤에서 시작하여 2004년에는 의무수입물량이 약 20만 4천 톤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4년 쌀재협상을 통해 추가로 10년(2005∼2014년) 동안 관세화를 유예하는 대신 의무수입물량을 두 배로 늘리도록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올해 쌀의 의무수입물량은 약 40만 8천 톤에 이르게 되었다.
지난 쌀 재협상에서 결정된 10년의 기간이 올해로 끝나기 때문에 내년부터 쌀 시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왔다. 공식적인 발표만 없었을 뿐 정부의 입장은 사실상 내년부터 쌀 시장을 관세화로 개방하는 것으로 결정한 상태나 다름없다. 이 방안은 앞으로 매년 40만 8천 톤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고, 그 외에도 누구든지 관세만 부담하면 자유롭게 쌀을 수입하도록 자유화하겠다는 것으로 쌀 시장 전면 개방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에 대해 농민단체를 포함한 식량주권 지키기 범국민운동본부는 도하개발아젠다(DDA) 농업협상이 타결될 때까지는 올해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현상유지(standing still)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주장은 앞으로 매년 40만 8천 톤을 의무적으로 수입하되, 나머지 쌀 수입은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으로 현재와 같은 부분 개방 상태를 DDA 농업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유지하자는 것이다.
정부도 인정하고 있듯이 관세화 보다는 현상유지가 국내 쌀 농업을 위해서는 최선의 방안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정부는 현상유지가 실현불가능하기 때문에 관세화로 개방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현상유지가 최선의 방안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정작 현상유지를 실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도나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 상대방 국가와 진지하게 협상을 벌이거나 세계무역기구(WTO)에 공식적으로 질의하는 등의 노력은 아예 하지도 않고 현상유지가 불가능하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쌀 관세화는 우리나라가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는 카드이다. 이 말은 관세화보다 더 좋은 방안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시도해보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선택해도 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세화만을 고집하는 이 정부는 ‘총성 없는 전쟁’으로 불리는 통상협상에서 순진하거나 무능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WTO 농업협정문에 따라 선진국은 6년(1995∼2000년), 개발도상국은 10년(1995∼2004년) 동안 의무를 이행했다. 그리고 협정문 제20조에 규정된, 이른바 DDA 농업협상으로 불리는 새로운 협정문이 나올 때까지는 추가적인 개방조치 없이 현상유지를 하고 있다. 그래서 선진국은 2000년의 개방수준에, 개발도상국은 2004년의 개방수준에 머물면서 현재까지 각각 10년, 14년 동안 현상유지를 해왔다. 이런 상황과 논리를 무시하고 내년부터 쌀시장을 관세화로 개방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른 나라의 현상유지에 상관없이 우리나라만 일방적으로 추가적이고 새로운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다른 나라와의 형평성도 요구하지 못하는 이런 식의 순진함은 결국 쌀 농업과 농민의 피해만 키울 뿐이다. 그리고 정부는 관세화로 개방하더라도 약 400% 이상의 고율 관세를 부과할 수 있기 때문에 의무수입물량 이외의 쌀 수입 증가는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율관세 주장은 절반의 사실만 말하고 있다. 이미 미국은 한미FTA를 통한 추가적인 요구 혹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을 위한 입장료 차원에서 미국산 쌀에 대한 관세 철폐 혹은 관세의 대폭 인하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산 쌀의 관세 철폐 혹은 대폭 인하는 곧바로 한중FTA와 연계하여 중국이 미국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다.
국민의 주식인 밥쌀용 쌀을 한국에 수출할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미국과 중국 밖에 없다. 둘 중 어느 한 나라만이라도 쌀의 관세를 철폐하거나 대폭 인하할 경우 정부가 내세우는 고율 관세는 허울뿐인 빈껍데기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나머지 절반의 진실을 솔직하게 밝히지 않고 고율 관세만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언술에 불과하다. 적어도 고율관세의 주장이 최소한의 타당성이라도 갖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쌀을 FTA 및 TPP 등과 연계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확약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약속 없는 고율관세 주장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기만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정부가 관세화를 선택하더라도 다른 이해당사국과 관세율을 결정하기 위한 협상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현상유지를 선택하더라도 주요 이해당사국과 협상해야 하는 상황으로 귀결될 것이다. 게다가 한미 FTA,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한중 FTA 등과 연계하여 쌀도 협상의 대상에 포함될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결국 쌀 문제는 주요 이해당사국과의 복합적인 협상을 통해 결정될 수밖에 없는 사항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관세화로 자승자박의 자충수를 두고서 협상장에 나서는 것은 무능한 오류를 범하는 것과 같다. 쌀과 연관된 여러 가지 협상이 예정되어 있거나 혹은 예상되는 상황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고차원의 방정식을 풀어가는 고도의 해법과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인도 정부가 작년에 ‘국민식량보장법’을 제정하면서 지지가격에 의한 수매제도 때문에 WTO 농업협정문을 위반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에 대해 다른 나라들이 문제 삼지 않도록 협상을 통해 관철시킨 바 있다. 작년 12월 WTO 최고의결기구인 각료회의 합의문, 소위 발리패키지의 주요 합의사항 가운데 하나가 그것에 해당한다. 이러한 인도의 통상협상 의지와 능력을 우리 정부는 반면교사의 사례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