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으로부터의 연대와 혁신(2): 사회적 경제는 사회적 신뢰를 먹고 자란다.

김종걸 한양대 글로벌사회적경제학과 교수

1. 이기심의 공간으로서의 시장

모든 상품생산은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충족시키는 행위다. 빵은 배고픔에서, 두툼한 외투는 추위에서, 그리고 의사의 진료는 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란 상품의 생산과 교환이 곳곳에 침투한 사회를 말한다. 사회는 극도로 분업화되고, 모든 생산물은 시장을 통해 교환된다. 초과공급이 있다면 가격이 조정되고 이에 맞도록 생산은 감소하며 수요는 증가한다. 노동시장, 자본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공급하려는 자와 수요하려는 자는 가격(임금, 이자)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정되어 간다.

사실 시장이 꼭 이기심의 공간일 필요는 없다. 나중에 설명하겠으나 ‘상호적 이타성’에 입각한 경제(사회적경제)도 시장 속에서 훌륭히 작동된다. 그러나 시장의 주역은 역시 이기심이다. 이기적 시장참여자가 결국에는 사회전체의 행복(이타성)으로 귀결되어 간다는 논리가 오히려 자연스럽다. 아담 스미스의 논법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정치하게 논리화시킨 것이 바로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수요와 공급은 소비자의 효용과 생산자의 이윤이 최대화되는 행동원리를 잘 반영한 것이었다. 인기 많은 맨큐(Mankiw)의 경제학교과서 첫 장에는 경제학을 관통하는 ‘10대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내용의 중심은, 사람은 이기적이며(제4원리), 자유거래는 모두에게 이로우며(제5원리), 시장은 경제활동을 조직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제6원리)라는 것이다. 나머지는 이 뼈대를 보충하기 위한 원리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뒤의 길고 긴 책의 내용은 바로 이것을 증명하기 위한 이론과 사례로 채워져 있다.

확실히 시장은 무수히 많은 개인들의 행동을 조정하는 가장 좋은 장치다. 적어도 현존하는 제도 속에서는 그렇다. 노동이 자본보다 상대적으로 풍부한 나라에서는 노동집약적인 제품의 생산이 유리하며 당연히 그것이 더 많이 생산된다. 스파게티수요가 냉면수요보다 많은 사회는 더 많은 자원을 스파게티 생산에 투입한다. 무엇을 얼마나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공급할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시장만큼 효율적인 제도를 인류는 아직 발명하지 못했다.

시장에 의해 인류가 전례 없는 풍요를 누리는 것도 사실이다. 시장에서의 경쟁압박은 도산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피나는 노력으로 귀결된다. 특별이윤을 획득하기 노력(탐욕) 또한 맹렬한 물적 성장의 기반이었다. 생각해보면 인류사회는 아주 오랜 세월 맬서스의 인구함정에 빠져있었다. 경제적 잉여가 발생해도 그것은 금방 인구증가에 의해 소진되어 갔다. 인구가 너무 늘어나면 때로는 역병이 창궐하고 전쟁이 발발하여 강제적인 조정기제를 작동시켰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의 시장의 발전은 이 모든 제한에서 인류를 탈출시켰다. 인구도 급증하고 1인당 소득도 늘어났다. 인간의 이기심은 시장이라는 제도를 통해 그들의 필요와 탐욕을 충족시킬 새로운 ‘무기’를 장착한 것이었다.

2. 시장의 실패, 정부의 실패

그러나 시장이 제대로 작동되기란 참 어렵다. 먼저는 독점이다. 시장은 대부분 특권(독점)에 의해서 장악되는 경우가 많다. 시장이란 무수히 많은 참여자가 진검승부를 겨루는 곳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불과했다. 시장은 때대로 거짓말이 난무하는 곳이기도 했다. ‘계약의 실패’와 관련된 것이다. 예를 들어 육체적 정신적 약자인 치매노인 스스로가 요양시설, 간병서비스의 질을 판단하긴 아주 어렵다.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의사의 한마디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며, 이 때 환자는 계약의 약자일 수밖에 없다. 정보를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없었을 때 소비자의 선택은 크게 상처받기 마련이다. 시장에서의 거래가 한 사회의 사회적 비용과 편익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외부성’의 문제다. 시장에서 거래된다는 것은 원래 자신의 편익(수익)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불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다. 검은 굴뚝의 공장과 현대자동차의 활발한 생산은 스모그와 미세먼지로 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다. 부(negative)의 외부효과인 것이다.

시장이 가져오는 불편함은 단지 이것만이 아니다. 시장은 거래에 참여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애초부터 배제시킨다. 지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죽어야 하는가? 이것이 문제다. 이것을 사고하는데 있어서 일본을 대표하는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후미(宇?弘文)의 ‘사회적 공통자본’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유용하다. 우자와는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말하는 단순한 ‘공공재’의 사고방식(비배제성과 비경합성을 가진 재화로서의 공공재)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사회구성원이 누려야 할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권리를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공공재’를 재규정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이 “설령 사적소유 또는 사적관리가 인정되는 희소자원으로 구성돼 있다고 해도 사회전체의 공동재산으로서 사회적인 기준에 따라 관리, 운영”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구체적으로는 자연환경(대기, 물, 산림, 하천 등), 사회적 인프라(도로교통, 상하수도, 전력가스, 주택 등), 제도자본(교육, 의료, 금융 등)을 사회적 공통자본이라고 부르며 이것의 안정적인 공급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정부가 할 일은 명확하다. 정부는 다리와 도로를 만들고(공공재공급), 공정거래법을 운영하며(독과점견제), 환경을 규제하고(외부효과의 시정), 의사자격제도와 같은 서비스공급기준(계약실패 시정)을 책정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 삶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적 공통자본을 잘 정비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정부란 그리 ‘똑똑’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정부란 “국민복지에 복무하는” 추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구체적으로는 정치인과 공무원의 세계를 말하며 많은 경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정부실패’라고 말한다. 사실 세간의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신자유주의도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신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 복지국가가 초래했던 정부기구의 비대화와 비효율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도입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정부실패’를 단지 ‘시장확대’로 해결하려 했던 점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의해 우리의 경제사회적 불안정성이 더욱 증대된 것도 사실이다

3. 시민의 주체적 대응: 사회적경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해법 중의 하나는 기존의 시장과 정치·관료체계의 외곽에 시민사회의 거대한 저수지를 만드는 것이다. 시장과 정부가 실패하는 곳에서 사회는 자기보호를 위해 움직인다. 따라서 다양한 시민의 자조조직이 발전하기 마련이다. 구매생협과 의료생협은 믿을 수 있는 제품과 안전한 의료를 제공받기 위한 시민의 자발적인 노력이다. 사회적기업도 이윤극대화의 원리와는 애초부터 궤를 달리한다. 사회적경제란 시장실패와 정부실패가 야기하는 각종의 사회문제를 풀기위한 시민의 주체적 노력을 말한다. 필자는 사회적경제를 이렇게 규정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2가지의 구성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경제의 첫 번째 구성요소는 사회적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조직이라는 것이다. 사실 모든 합법적 상품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사용가치) 중 화폐와 교환 가능한 것(교환가치)을 생산한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을 생산한다는 차원에서는 굳이 차이가 없다. 사회적경제조직과 차이가 있다면 활동의 주요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국통산성(DTI)의 정의, “사회적기업이란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는 기업으로서 기업의 이익이 주주 및 소유주들에게 귀속되기보다는 사업의 고유목적 혹은 지역공동체에 재투자되는 기업”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이러한 성격을 잘 나타낸다. 협동조합 또한 일반기업과는 완연히 다르다. 이윤이 아니라 조합원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문제를 풀기위한 자발적인 조직인 것이다.

사회적경제의 두 번째 구성요소는 사람중심성에 있다. 나라마다 상법상 규정의 차이는 있으나 기업의 지배자는 자본소유자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돈에 의해 지배구조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경제조직은 사회적 소유(비영리법인), 공동소유(협동조합), 사회적 통제(이해관계자의 영향력) 등 민주적 소유?지배가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민주주의의 원칙이 경제에 적용되는 것이다.

사회적 목적의 실현, 그리고 사람중심성이라는 2가지 축에서 본다면 유럽의 대부분의 논자는 이 2가지를 모두 갖춘 조직을 사회적경제 조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다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적 목적을 잘 실현하는 것에 있을 뿐이다. 소유?지배구조의 민주성과 같은 사람중심성은 부차적인 조건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보자. 유럽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경제의 최대 연구조직인 EMES에서는 다음과 같이 사회적기업(경제)를 개념 규정한 바 있었다. ①재화를 생산하고 용역을 판매하는 지속적인 활동, ②높은 수준의 자율성, ③상당 정도의 경제적 리스크, ④최소한 이상의 임금노동, ⑤공동체에 혜택을 주고자 하는 명시적인 목표, ⑥분담금액수와 비례하지 않는 의사결정구조, ⑦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 ⑧제한적 이익분배, ⑨일반시민 주도성이 그것이다. 이들의 논의를 정리한다면, 사회적 경제조직이란 시민의 주도 하에(②⑨),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⑤⑧), 시장 속에서 활동하는 조직이며(①③④), 민주적 지배질서(⑥⑦)가 작동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미국 하바드대학의 디즈(Dees) 교수는 사회적기업이란 사회적 목적과 비즈니스의 수법을 결합한 조직이라고 말한다. 그 속에는 상업활동을 전개하는 비영리조직만이 아니라 영리목적과 사회적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중목적기업, 그리고 영리기업의 사회공헌활동까지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인식은 미국의 사회혁신과 관련된 각종 재단의 사고방식과도 큰 차이가 없다. 가령 아쇼카(Ashoka)에서는 전 세계 3,000명이 넘는 아쇼카펠로를 선정하고 지원한다. 그 분야도 교육, 인권, 시민참여, 환경 등 다양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제기하는 사회문제의 심각성이며, 그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다는 혁신성이다. 소유?지배구조, 법인격의 종류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어떠한 기준에서든 사회적경제의 규모는 이미 상당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협동조합은 전 세계에서 매년 2.2조 달러의 매출을 실현한다. 미국에서만 3만 개의 협동조합이 20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낸다. 프랑스에서도 2만 1000개의 협동조합이 1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국제협동조합연맹 통계). 시민사회 연구로 유명한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시민사회연구소의 연구에 의하면 시민단체 상근인력 및 자원봉사자의 노동시간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9.80%(미국). 8.54%(영국), 2.43%(한국)에 달한다(www.ccss.jhu.edu). 최근에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거대한 자금이 투여되고 있다는 연구도 많다. 한 연구(Monitor Institute)에 의하면 사회적기업 등에 투자되는 자금(임팩트 펀드)은 세계 총 자금의 1% 정도, 즉 5,000억 달러(약 605조원)로 추산된다. 규모가 이러하니 전 세계 사회적기업가는 그 자금을 받기 위해 자신을 능력을 증명하려 노력한다. 하버드(Harvard), 스탠퍼드(Stanford), 옥스퍼드(Oxford) 등 세계 유수의 경영대학원에서도 우수한 사회적기업가를 키우는 별도의 교육과정을 개설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4. 호혜적 이타성의 재발견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사회적경제는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 필자는 이것을 호혜적 이타성(reciprocal altruism)이라고 본다. 지금 이 순간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보답을 기대하며 남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 즉 조건부 이타성을 말한다. 사람이 이기적인지 이타적인지는 참 많은 사람들이 고민했던 주제다. 톨스토이의 우화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가난한 구두 수선쟁이 세묜이 한 젊은이를 집으로 데려오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였던 그 젊은이는 한겨울 벌거벗을 채로 성당 옆에 쓰러져 있었다. 세묜의 부인은 일도 못하고 술은 마시고 덤으로 객식구까지 데려온 남편에게 무서운 독설을 퍼 붇는다. 그러다 이내 따뜻한 스프와 거치른 빵이라도 내놓기 위해 부엌으로 향한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살피는 마음(이기심)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남을 위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기심의 정당성을 설파했던 아담 스미스조차도 인간 본성에 가지고 있는 이타적 심성에 대해 충분히 강조한다.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연민(pity)과 동정심(compassion)이 이런 종류의 천성에 속한다.” 아담 스미스가 상정했던 인간의 삶이란 시장에서의 인간의 이기심만이 작동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윤리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이기심이 조정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이타심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 의해 보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는 이타성이 무한정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등가성의 원칙이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 나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일종의 호혜성의 원칙인 것이다. 앞의 톨스토이 우화에서 말한다면 젊은이가 만약 착실한 일꾼이 아니었다면 부인의 호의는 한번으로 끝났을 것이다. 자원봉사자가 많은 나라, 기부가 일상화되어 있는 나라는 이러한 호혜성의 원칙이 잘 작동되는 나라다. 협동조합이 잘 발전되어 있는 나라도 그렇다. 1인=1표의 민주주의 원칙을 고수한다는 것은 부담(출자금)과 권한(지배력)의 등가적인 교환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장기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신뢰)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인간 간의 신뢰란 너무나 연약한 자본이라는 점이다. 묻지마 살인이 벌어지는 흉흉한 사회는 사회적 신뢰를 급속히 떨어트린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조직, 즉 가족 및 친구관계로 스스로의 연결망을 축소시킨다.

필자가 오늘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회적경제는 중요하다. 시장과 국가의 실패가 너무나 명확한 곳에서는 그 필요성이 더욱 크다. 사회적경제란 한 사회의 이타적 호혜성을 먹고 산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곳에서나 가능하다. 어떻게 하면 사회의 총량을 늘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회적 신뢰의 연결망을 조밀히 구성할 수 있을까. 앞으로 깊게 고민해볼 일이다.(끝).

<인용문헌>

1.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비봉출판, 2009년.

2. 그레고리 맨큐, 경제학, 교보문고, 2012년.

3. 우자와 히로후미, 사회적 공통자본, 필맥출판, 2008년.

4. 레프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문예출판, 2015년.

5. Dees, Enterprising Nonporfit, Harvard Business Review, Vol.76/1, 1998년.

6. Defourny and Nyssens, The EMES Approach of Social enterprise in a Comparative Perspective, EMES European Research Network Working Paper, 2012년.

7. Department of Trade and Industry, U.K., Social Enterprise: A Strategy for Success, 2002년.

8. Monitor Institute, Investing for social and environmental impact,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