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으로부터의 연대와 혁신(1): 특권 없는 사회

 

김종걸 한양대 글로벌사회적경제학과 교수

1. 역사의 종말?

1930년대 일본 교토(京都)대학을 중심으로 성행하던 교토학파에서는 근대의 초극(超克)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근대사회(modern society)를 초월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논리의 밑바닥에는 천황중심의 대동아공영권으로 이어지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그럼에도 문제제기는 한편 통렬했다. 정치적 자유주의(대의제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자본주의,시장주의)라는 근대사회의 2가지 운영축이 공동체의 파괴, 황금만능주의, 인간성의 소외 등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일본 가미가제특공대의 유서집을 읽다보면 그들이 얼마나 근대사회의 작동원리와 가치를 미워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히틀러의 나치즘, 무솔리니의 파시즘의 논리 속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필자가 조금은 극단적인 형태의 비판을 열거했으나, 사실 근대사회에 대한 비판은 마르크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현대의 공동체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원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란 노동이 착취되고 기계의 일부분으로 고착화되는 사회였다. 노동은 인간을 완성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고통과 소외의 과정에 불과했다. 마르크스는 노동 결과물로부터의 소외(배분의 문제), 노동 과정으로부터의 소외(생산과정의 문제), 그리고 노동 그 자체로부터의 소외(인간성의 상실)라는 3가지 차원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찰리 채플린 주연의 <모던 타임즈>라는 영화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주인공에게 있어서 노동이란 생계유지를 위한 고통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와 논점은 다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에서도 근대문명은 억압에 불과했다. 개개인은 연대와 배려의 자그마한 인적 공동체에서 벗어나 파편화된 형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속에서 애국심을 강요받는다. 정확한 시간인식, 질서의식 등 근대사회가 요구하는 도덕률에 따라 규격화되며, 이에 순응하지 못하는 자는 사회에서 배제되기도 한다.
긴 시간 다양한 비판이 있었으나 근대사회의 대변인들에게 있어서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는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언어였다. 왕과 귀족의 억압에서 벗어나 일반 시민에게 권력이 이양되었으며, 특권에서 경쟁으로 사람관계가 변화되었다. 이기심과 탐욕이 당당히 자신의 시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회이기도 했다. 그것이 기술개발과 경제발전을 가져와 풍요롭고 자유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당히 성공한 것도 사실이다. 최대 경쟁자였던 사회주의 세력은 체제경쟁에 뒤쳐져 붕괴해 버렸다. 중국의 개혁개방(1979년), 베를린장벽 붕괴(1989년), 소련 해체(1991년) 등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실험은 이미 ‘종말’된 것처럼 보였다.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표현대로 ‘역사의 종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래도 좋은 것인가. 경제적?정치적 특권은 여전하며, 민주주의는 형식화되고, 빈부격차는 극심하며, 환경은 파괴되고, 의료?약품?물 등 인간생활의 가장 기초적인 필요조차도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는데 역사가 과연 끝났다고 말해도 좋을 것인가. 사회주의의 견제력을 잃어버린 자본주의는 더욱 더 폭주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발생 초기의 순수한 형태, 즉 자본의 이윤추구와 개개인의 자기책임, 그리고 경쟁의 끝임 없는 압박 속으로 ‘역류(逆流)’하는 경향도 강하게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1848년 그의 <공산당선언>에서 구체제를 뒤흔드는 공산주의라는 ‘요괴’가 유럽에서 출현해 결국은 전 세계의 권력을 잡아 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160년도 훌쩍 넘은 지금, 자본주의를 부정하려는 시도든, 아니면 자본주의를 수정하려는 노력은 크게 약화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요괴’가 아닌, 신자유주적인 시장화의 ‘요괴’가 전 세계의 권력을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2. 근대사회의 논리구조

생각해보면 평등한 정치적 자유의 확보는 근대국가의 기둥이었다. 만민이 평등하다는 사실은 자연 상태에서 인간에게 부여된 기본법(자연법)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왕권조차도 하늘이 내려준 것이 아니라 시민의 계약에 의해서 성립되었다고 생각했다. 각국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은 절대 왕정을 타도하며, 봉건적 특권을 폐지하고, 시민의 참정권을 확보하는 과정이었다. 영국의 명예혁명(1688년)과 권리장전(1689년)은 자유로운 의회의 선거를 보장하고, 법제정과 세금부과 권한을 의회에게 이양시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물론 여성과 무산자들에게까지 보통선거권이 확대되기에는 아직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시민 권력을 인정하는 혁명은 미국독립전쟁(1776년)과 프랑스혁명(1789년)을 거치며 전 세계로 확산되어갔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를 포함하여 현대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정치이념과 체계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그 실현형태인 대의제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근대사회의 또 다른 축은 바로 경제적 자유주의였다. 사유재산권에 기반 하여 자유로운 상행위를 정당화한 것이었다. 오랜 세월 경제적 이기심은 비난과 경계의 대상이었다. 성경에서도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복음 19:24)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은 동양사회라고 다르지 않았다. 유교에서 말하는 사농공상은 수평적 분업개념이 아니라 상공업을 천시하는 사회적 서열을 나타냈다. 전근대 사회에서의 상품교환이란 필요를 충족시키는 행위일 뿐이지, 이윤추구의 수단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에 걸 맞는 가치관도 형성되어 갔다. 특히 고리대금업은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범위였다.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이 그토록 추악하게 묘사되는 이유는 그가 유태인이기도 했으나 바로 고리대금업자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근대 자본주의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윤추구에 대한 정당한 시민권을 부여해야만 했다. 사유재산은 천부의 권리로 인정되며, 자유로운 상행위와 이기적 이윤추구는 사회전체의 행복증진을 위한 ‘이타적’ 행위로 격상되었다. 아담 스미스(A. Smith)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장 잘 나타낸다. “우리가 식사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이야기 한다”(김수행 번역 국부론, 상권, 22쪽). 이제 드디어 도덕철학은 개인의 탐욕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가하지 않게 된다. 그 극단적인 표현이 바로 공리주의였다. 제레미 벤담(J. Bentham)과 같은 공리주의자들은 인간은 모두가 자기 자신의 쾌락증가와 고통감소를 당연시하며, 쾌락 마이너스 고통, 즉 총 효용(utility)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행위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벤담에게서 쾌락이란 정신적 세계가 아니라 물질적이며 세속적인 쾌락이었던 것이었다.
이후 이러한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을 경제적 인간(호모에코노미쿠스)라는 가정 하에 발전시켜 간 것이 바로 지금의 주류경제학인 신고전파 경제학이다. 물론 인간이 완전히 호모에코노미쿠스일리가 없다. 인간이 계산적이며 이기적인 성향만을 가진다는 가정은 사회를 위한 봉사, 친구와의 우정, 가족 간의 우애 등 인간생활의 다양한 모습을 반영하지 못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사이코패스로 불러야한다. 아무리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라도 사이코패스를 분석대상으로 했을 리가 없다. 그들은 상품의 생산과 교환이 전면화 된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행동원리를 호모에코노미쿠스로 정식화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시장경제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단면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가지의 문제는 남는다. 첫째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닌 협동하는 종(種)으로서의 인간, 봉사하고 헌신하는 윤리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제외해 버렸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단순한 ‘경제인’이 아니다. 때로는 남들에게 베풀고,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기도 하는 윤리적인 존재다. 개개인의 사익추구의 정당성을 강조한 아담 스미스의 가설은 사익을 견제하는 양심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은 양심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 의해서 제대로 작동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인식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에게는 별로 없었다. 둘째는 시장이 완벽하며 심지어는 참여자 모두에게 행복을 준다는 사고방식이다. 표준적인 경제학 교과서에서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은 명확한 원칙에 따라 도출된다. 소비자의 효용극대화의 행동원리가 수요곡선으로 나타나며, 생산자의 이윤최대화의 행동원리가 공급곡선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이 만나는 곳, 즉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가 만족하는 점이 바로 시장균형점인 것이다. 이 세계 속에서는 불평등도 불만도 들어갈 여지가 없다. 시장에 참가하는 모든 존재는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균형점은 일정한 제약조건(기술 및 소득조건) 하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선택을 한 결과였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 과거 미국 시카고대학의 한 강의실에서 자유지상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흑인이 못사는 이유는 그들이 젊었을 때 공부가 아니라 노는 것을 선택한 ‘자유’의 결과라고. 그때 한 흑인 학생이 손을 들어 말했다. “프리드먼 교수님, 저에게 부모를 선택할 ‘자유’가 있었나요?” 같은 시기 시카고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던 일본의 저명한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후미(宇澤弘文)의 증언이다. 누구나 부모를 선택할 자유는 없다. 가난한 학생들이 고액의 명품강의를 들을 ‘자유’도, 영어연수를 떠날 ‘자유’도 없다. 출세를 위해 부모의 인맥을 활용할 ‘자유’도, 내 집 마련과 부모봉양에 휘어 재테크에 전념할 ‘자유’도 없다. 출발점이 다르면 결과도 다르다. 그런데도 신고전파 경제학에서는 그 모든 행위는 최선의 선택의 결과라고 가정한다. 최선의 선택이 행복한 선택과는 차이가 나는데도 말이다. 결국 불평등과 불만에 대한 그 어떠한 해석도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3. 특권 없는 사회

근대사회의 지향점은 바로 특권 없는 사회였다. 정치적 특권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며, 경제적 특권을 제어해야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왕과 귀족의 권력은 전문 정치인과 관료의 권력으로, 중세 특권상인들의 권력은 독점기업가의 권력으로 대채되어 갔다. 제임스 뷰캐넌(198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 법칙에 빗대어 정치에서의 그레샴 법칙을 말한 적이 있다. 개인적 욕심이 많은 정치인은 더욱 맹렬히 권력쟁취에 힘을 쏟으며, 그래서 더 좋은 정치인을 몰아낸다는 것이다. 많은 나라에서의 정치의 현실은 뷰캐넌이 염려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비민주적 국가의 권력 획득과 유지 방식을 아주 잘 묘사한 적이 있었다. 그는 최고의 군주란 “우호세력을 만들고, 무력이나 속임수로 정복하고, 백성으로부터 사랑과 함께 두려움을 품게 하며,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정적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7장). 국민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가 민주주의를 형식화시키며, 결과적으로 마키아벨리 식의 독재자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국가권력은 다수결 혹은 여론몰이의 형태로 소수자를 억압하기도 한다.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관용과 합리적 토론의 정신이 상실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상위 1%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것이 2011년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령운동과 영국의 청년폭동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세상살이의 출발점, 과정, 결과가 너무나도 불평등한 것에 대한 불만의 폭발이었다. 한국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세칭 금수저들은 혼맥?학맥?금맥의 동심원을 이용해 사회적 지위를 겹겹이 쌓아간다. 대다수의 서민들은 그들의 승승장구를 부러움과 자괴감으로 바라본다. 그 어떠한 통계를 열거해도 이 추세에는 변함이 없다. 소득불평등의 증가, 노동소득분배율의 하락, 비정규직 비율의 증가, 가계소득과 기업소득 간의 격차확대, 절대빈곤율의 상승 등 한국 땅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중산층이 몰락하고 빈곤이 대물림되는 세상인 것이다.
혹자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는 최대한 보장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사유재산과 자유에 입각한 영리활동이 시장을 통해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고 말한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이러한 이야기에 존 스튜어트 밀, 존 로크, 아담 스미스 등이 인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밀, 로크, 스미스가 강조했던 것은 바로 ‘특권사회’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부당한 권력으로부터의 탈출(밀), 왕권신수설로부터의 탈출(로크), 특권상인으로부터의 탈출(스미스) 등 그들은 출발점이 평등한 개인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사회의 기본정신이었다.
민주국가의 운영원리는 누구나 평등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 기회의 평등이 바로 공정함의 기초인 것이다. 부와 지위와 능력이 대물림되는 신분제사회는 근대사회의 기본정신에 반한다. 바꿔야 할 일이다. 그러나 시정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 존 롤즈가 ‘최소 수혜자의 최우선 배분의 원칙’이라고 말했던 내용이다. 복지의 총량을 확대하고 가난한 자의 능력을 높이는 것, 그것이 정의로운 일이며 결과적으로도 좋은 경제적 성과로 귀결된다는 연구는 얼마든지 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능력이다. 복지예산이 부족하다면 늘려야 하며 세금이 부족하다면 걷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기득권층의 ‘선의’에 의해서 실현되지 않는다. 그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서 세상은 바뀌어갈 수 있다. 경제사회적 특권을 없애는 정치기획, 그 깨어있는 시민의 정치참여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