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봄, 베를린 통신 – 슬기로운 백수생활
이미옥(미래 먹거리 프로젝트 준비 중)
베를린에서 두 달 쯤 살아보면 어떨까?
지난 연말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당분간 백수생활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혼자만의 시간, 멀리 떨어진 장소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궁금했던 도시를 꼽아보니 단연 베를린이 생각났다. 베를린 장벽붕괴 (1989년) 이후 어떤 도시가 되었을까 하는 오랜 관심에서부터, 최근 몇 년 새 전 세계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600개가 넘는 갤러리와 박물관, 크고 작은 영화관, 클럽, 이벤트 등 유럽 문화 예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변모하고 있다는 얘기, 무엇보다 물가가 저렴하다는 점, 시민들이 도시 재생을 비롯한 도시의 여러 정책과 방향에 적극 참여하여 결정한다는 등의 뉴스가 나를 이 도시로 이끌었다.
코로나가 이렇게까지 전 세계로 확산될 거라 예상 못했던 2월 중순 베를린에 도착해 현재까지 두 달 넘게 지내고 있다. 그 동안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해 보았지만, 한 도시에 장기간 머물 숙소를 정해 생활하며 하나씩 천천히 발견해 나가는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베를린 지도를 펼쳐 벽에 붙여놓고 한군데씩 동그라미를 쳐가며 전철, 트램, 버스를 타고 걸어 다니다 보니 어느새 낯선 도시가 점차 눈에 익고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로움이 생겼다. 이삼 일에 몰아서 집중 투어를 하는 것보다 일주일에 두세 군데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아 새롭게 감성을 충전하면서 도시의 동서남북, 골목골목을 찾아다니는 일은 생활 여행자로 머물고 있는 내게 적당하다.
베를린에서 생활을 해보니 물가가 싸다. 정말 큰 이점이다. 전 세계 아티스트들과 스타트업 청년들이 몰려들면서 최근 집값이 오르고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나타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긴 한데, 그럼에도 여전히 뉴욕, 런던, 파리, 서울 등 주요 도시들과 비교할 때 굉장히 저렴하다. 이곳 생활을 하며 가장 즐거운 일과는 에데카(EDEKA), 레베(REWE), 알디(ALDI) 등 슈퍼마켓에서 물건 하나하나 구경하며 장보는 일이다. 장볼 때마다 싼 가격에 망설이지 않고 쉽게 이것저것 살 수 있다. 독일 사람들의 주식이라 할 수 있는 육류, 소시지, 계란, 유제품, 감자를 비롯해 맥주, 와인 등 웬만한 식료품은 한국의 절반 이하 가격에 구매 가능하다. 심지어 알디(ALDI), 리들(LIDL), 네토(NETTO) 등 슈퍼마켓은 카테고리 별로 몇 가지 품목 만 판매하는 대신 저렴한 가격으로 차별화함으로써 소비자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준다. 독일에는 이마트, 롯데마트 같은 대형마트 대신 이러한 중소 규모의 슈퍼마켓이 거리마다 두 세 개 씩 있어서 동네 주민들이 퇴근길에 들러 그날그날 필요한 만큼씩 장을 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유기농 제품을 사려면 마트의 별도 코너나 유기농 매장에서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반면, 여기서는 모든 슈퍼마켓에 유기농 마크를 달고 있는 제품이 주류인가 싶게 흔한데다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다. 다양한 야채와 해산물, 해조류가 구비되어 있는 한국과는 다르게, 알나투라(Alnatura), 바이오컴퍼니(BIO Company), 엘페게 비오마크트(LPG Biomarkt) 등 유기농 전문매장들에는 유기농 육류, 유제품과 반조리식품, 가공식품 및 화장품, 맥주, 와인, 각종 소스를 포함하여 다양한 비건 제품까지 등 종류가 엄청나게 많다. 이러한 유기농 매장들을 방문해보고 홈페이지에 들어가 살펴보니 대부분 ‘유기농, 비건, 공정무역, 로컬’ 등의 콘셉트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자랑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이 콘셉트들을 결합하여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 열심히 탐구를 하고 있다. 게다가 난 공정무역 마케터이자 아이쿱생협 조합원이 아닌가? 어떤 제품을 구매하든 자연스럽게 뒷면을 돌려서 보며 어디서 온 어떤 재료들로 만든 것인지, 포장재는 어떤 걸 사용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 가까운 곳에 BIO Company 매장이 있어서 자주 들르는데, 이곳에서 판매하는 제품 대부분은 유기농 마크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닐과 플라스틱을 최소화한 포장재를 사용하고 있다. 매장 한 쪽 벽면에는 곡물, 넛트, 시리얼, 우유, 생수 등 원하는 만큼 무게를 재고 유리병 등에 담아갈 수 있도록 포장재 없는(unverpackt) 코너가 자리 잡고 있으며, 야채와 과일 코너에는 비닐 대신 종이봉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장을 볼 때 마다 매장 여기저기, 제품 앞면, 뒷면을 살피며 알고 있는 독일어와 구*번역기를 활용하여 1차 확인을 하고, 숙소에 돌아와 요리를 하면서도 이리 저리 꼼꼼하게 탐구하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멀리 베를린까지 와서 더군다나 코로나 때문에 박물관과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이때에 이런 소소한 탐구와 쇼핑에 재미를 찾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스런 일 아닌가?
독일은 2019년부터 ‘신포장재법’을 시행하여 제품 포장재를 다루는 모든 기업이 회수, 재활용, 폐기 관련한 수수료를 지불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제조사, 유통기업, 온라인기업이나 수입업체 모두에게 해당되며 기업들이 적극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1) 덕분에 베를린에서 생활하며 여러 가지 다양한 재료들을 사다가 음식을 해먹는데도 한국에서처럼 쌓여가는 플라스틱과 비닐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적이 없다. 쓰레기 분리수거 관련해서는 ‘판트(Pfand, 보증금)’ 시스템이 흥미롭다. 독일인들이 매일 마시는 병맥주와 생수를 구매할 때 일종의 보증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슈퍼마켓마다 설치되어 있는 기계에 빈 병을 넣으면 환급 영수증이 나오고 이것을 돈으로 받거나 물건 구매할 때 사용할 수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 너무나 간편한 방식이기도 하고 또 이렇게 수거한 플라스틱 폐기물의 약 절반이 재활용되고 있다고 한다.2) 포장재에 대한 책임부여와 빈 병 수거 및 재활용 방식은 우리나라에서도 참고할 만하다.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독일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2인 이상의 모임을 금지하는 ‘Contact Ban’을 시행하고 있다. 슈퍼마켓, 빵집, 드럭스토어, 약국 등을 제외한 가게들이 문을 닫고 테이크아웃이 가능한 카페, 레스토랑들만 운영을 하고 있다. 파스타면과 화장지 매대가 훤하게 비어가던 초기 1~2주 동안의 사재기 현상 이후 안정감을 회복한 독일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 정말 차분하게 일상생활을 살아간다. 이른 아침부터 조깅과 산책을 하고 주말엔 정원을 가꾸며 온 가족이 자전거 타고 공원에 다녀오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확진자 수 대비 낮은 사망률과 굳건한 공공의료 인프라, 그리고 정부, 정치인, 그들이 하는 결정에 대한 신뢰가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리라.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3) 베를린에 다시 봄이 찾아왔다. 인구밀도가 조밀하지 않은 도시 속에 촘촘히 자리 잡은 공원마다 초록색 나뭇잎들과 꽃들이 빈자리를 채워가는 계절이다. 도심 곳곳에서 마주치는 베를린 장벽의 흔적들과 유대인 학살에 대한 메모리얼, 박물관, 그라피티들을 간직한 채 이 도시가 자신들 만의 개발과 발전 방향을 차근차근 만들어가길 바란다. 5월초 한국으로 돌아가면 자가 격리의 시간을 가지며 앞으로 나의 삶을 다시 계획할 것이다. 그 때쯤엔 이곳에서의 백수생활을 다시 그리워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1) “독일 통일 30년 독일을 이야기하다3″, 2020, 한독경제인회
2) ‘독일, EU 규제와 더불어 눈길 끄는 플라스틱 대체용품’, 2019, http://news.kptra.or.kr
3) 2014년 베를린 클라우스 보러라이트?시장이 신년사에서 언급하면서 유명해졌으며, 정치적 수도인 베를린이 잘 살지는 못하지만, 다양한 나라 출신의 사람들이 섞여 살면서 문화적 다양성과 개방성, 자유로움을 가진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도시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