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윤종규(아이쿱생협 물품운영HQ 본부장)

주자학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 중에서 선비인 사(士)를 가장 존귀하게 여기고 農(농부), 工(공장), 商(상인) 순으로 존비(尊卑)가 결정된다. 조선시대 주자학과 함께 들어온 이 사농공상은 직업으로 존비귀천을 구분했던 조선시대 신분제도이자 윤리체계였다.1) 조선 말 이 직업에 따른 신분질서가 철폐되었지만 최근 종영된 ‘스카이캐슬’ 열풍을 보면서 사족(士族, 양반계급)의 수탈에 맺힌 한(恨)과 동시에 사(士)계급에 편입되고자 하는 동경(憧憬)의 양면성이 지금껏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관계도 마찬가지다. 보수진영은 ‘학자’, 진보진영은 ‘운동권’이었다는 것이 훈장이 되어 전문 현장 역량이 필요한 정관계 요직까지 차지하고 있는 ‘사(士)적’ 우월주의 프레임이 만들어낸 정관계 인사문화는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정작 필요한 지식, 기술, 전문성, 현장성을 갖추지 못한 부문이 많아 사회의 산적한 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 답답하기만 하다. 심지어 사회를 진보, 개혁시키겠다고 하는 농민운동, 노동운동, 생협운동의 진보진영 안에서조차 ‘사농공상’의 계급의식이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더 굳혀가는 듯하다. 지난 20년 간 운동성을 강조했던 수 많은 진보조직들이 사업에서 실패를 하고 나서도 운동성으로 포장하여 또 다른 사업을 일으키고 또 망하여 본인 뿐 아니라 주변 이들에까지 경제적 피해를 보게 하는 일들을 무수히 보아왔다.

물욕(物欲)을 부정하는 주자학처럼 고귀한 운동을 하다가 실패한 것이니 오히려 떳떳하다고 이야기 한다. 우리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외적으로 공상(사업성)이 이루어낸 성과에 대해 널리 알리고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 사농(운동성)을 앞세우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외부의 비판에 대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는가? 천박한 상업주의를 따라한다고, 일반 유통업체 같다고 비난하는데 함께하지 않았는가? 우리 안에도 사농공상의 구분이 존재하기 때문은 아닌가? 세미나, 포럼, 토론회, 해외협동조합과의 교류 등 수많은 행사는 ‘공’과 ‘상’을 배제한 ‘사’중심의 자리가 된 듯하고 이제는 ‘공’과 ‘상’이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고민조차 하지 않는 듯하다. 이러한 ‘사’(운동성) 중심의 교류의 결과로 정작 해외협동조합들이 취급하는 한국산제품들이 대기업제품 일색이다. 운동을 논하는 자리에서 사업(제품)을 이야기하는 것은 격(格)에 맞지 않는가? 아니면 운동과 사업은 이분화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있는 것은 아닌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이 중요하다. 사업이 배제된 생협운동은 앙꼬없는 찐빵 같은 모습이고 공허한 구호이다. 몬드라곤을 설립한 호세 마리아 신부는 그 누구보다도 기술의 중요성을 열렬히 강조하였다. 기술을 교육하면서도 그들에게 인류애와 협동과 노동의 중요성에 대해 함께 교육하였다.2)

같은 유교권 국가 중에서도 중국, 한국과 달리 일본은 주자학 영향을 받았어도 스스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고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루었다. 다른 일에 종사하지만 그 도는 같다는 ‘이업동도(異業同道)’, 실천을 중시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 자신이 하는 일 위에서 수양을 하라는 ‘사상마련(事上磨鍊)’의 정신을 강조하는 양명학을 널리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양명학 이라는 유교사상은 일본의 장인정신과 품질관리의 철학적 기초가 되고 일본의 근대화와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3) 현재 세계적인 중소기업 강국인 독일, 이태리, 이스라엘, 일본, 대만 등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 된 데에는 이러한 농공상을 중시하는 문화라는 공통점이 있다.

사농공상은 계급이나 계층이 아닌 ‘역할’이어야 한다. 세계 어느 나라 협동조합에도 우리와 같은 사농공상의 계급의식, 차별의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얼마 전 쿱이탈리아 물품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물품을 보는 기준이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름을 느꼈다. 쿱이탈리아에서 꼽는 최고의 물품은 이탈리아 장인(匠人)이 만든 물품이었다. 이들은 본인들의 경험과 기술을 자랑스럽게 후대에 전해준다. 우리 안에도 10년 이상 유기농, 무항생제로 물품(양곡, 농산, 축산)을 생산하는 생산자 장인이 있고, 각 공방에서 지속적으로 전문성을 쌓아가는 인재들이 계속 육성되고 있다. 조직이 커지면 당연히 분화되면서 전문성이 요구된다. 언제까지 운동성과 명분을 앞세워 조합원들에게 사용해 주세요만 외칠것인가? 명분, 운동성에 근거한 물품과 사업은 초기에는 힘을 받을 수 있으나 지속성과 확장성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앞서 증명되었다. 우리밀 사업이 그러했고, 과거 신토불이(身土不異) 마케팅전략도 그러했다. 현재 진행중인 공정무역 사업도 비슷한 조짐을 보이는 것 같다. 일례로 영국의 공정무역 개척자로 불리는 Traidcraft 는 1979년 설립되어 30년간 공정무역 사업을 해왔으나 최근 폐업수순을 밟고 있다고 한다.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판매대와 온라인몰, 전화주문에 의지했던 Traidcraft 는 이제 슈퍼마켓에서 흔하게 살 수 있게 된 다른 공정무역 상품들과 가격과 상품성 경쟁에서 뒤처졌다. 공정무역 물품을 파는 자원봉사자는 여전히 공정무역은 비지니스가 아니며 공정무역 물품을 파는 자신은 정의와 가난한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이라 말한다.4) Traidcraft 는 직원을 계속 줄이고 있고, 저개발국에서 판로를 잃어버린 공정무역 생산자는 이제 앞으로의 생계를 걱정해야할 지경이다. 공정무역도 사업과 운동, 모두 중요한데 우리나라의 공정무역은 유난히 사업성보다 운동성을 훨씬 더 중시하고 우대하는 모습이다.

생협에서 공급하는 물품에 생협의 가치를 담되 조합원이 구매하고 싶은 물품을 개발하고 생산하여야 한다. 생협이 추구하는 가치는 말과 함께 물품 속에 녹여내어 전파될 수 있어야 한다. 사업(공상)의 결과물이 운동(사농)의 정수(精髓)이어야 한다. 이 둘을 잘 균형화 하는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우리 아이들을 士 계층에 편입시키고 유지하기 위해 입시지옥 경쟁으로 몰아넣고 세계 최고 대학진학률을 달성하면서 졸업 후에는 공무원 시험에 매진하게 하는 스카이박스5)의 유혹에 우리 조차도 항상 노출되어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러한 사농공상 프레임에 갇혀 공(장인), 상(전문가) 육성에 집중투자하지 못하고, 대우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 봤으면 좋겠다.

 

The cooperative movement is an economic effort that is translated into an educational action, or, it is an educational effort that uses economic action as a vehicle of transformation.

Jose Maria Arizmendiarrieta

1) 김근배, 마케팅을 공자에게 배우다. 리더스북, 2012

2) https://www.remcmaster.com/economics/Mondragon_AppendixA.pdf,http://wiki.p2pfoundation.net/Mondragon1943년, 몬드라곤에 Jose Maria Arizmendi 신부가 부임한 직후 호세 마리아 신부는 바스크 지역의 젊은이들을 위한 기술학교를 조직하고 제조와 생산에 관한 전문적 기술과 가치를 함께 가르쳤다. 1956년 이 학교를 졸업한 5명의 졸업생들과 가스스토브 회사를 인수하여 협동조합 형태(1인 노동자 1투표권)로 조직하였고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다른 팀과 또 다른 회사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에로스키(Eroski)는 직원과 소비자가 소유한 대형 소매점으로 소비자에게 경쟁력 있는 대안이 되면서 월마트를 스페인에 정착하지 못하게 하였다. 몬드라곤은 스페인 경제에서 최첨단 산업체이며 해당 지역은 전 세계에서도 제조업 분야에 선두적인 지역이다. 실업률은 매우 낮고 1인당 소득액은 높다. 경제 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민주주의가 현실이 되어있다.

3) 김근배, 마케팅을 공자에게 배우다. 리더스북, 2012

4) https://www.bbc.com/news/business-45746732

5) 스카이박스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키려는 엘리트들의 열망과 욕구를 부추긴다. 한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즐겼던 프로 스포츠가 오히려 지금은 계층간 차이를 부각시키고 있다. [돈으로 살수 없는 것들] 마이클샌델,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