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칼럼]젠더와 협동조합
김찬호(성공회대, 사회학)
지난 몇 년 사이에 두드러진 한국사회의 마음 풍경 가운데 하나가 ‘여혐’이다. 한국의 가부장제 문화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지만, 지금의 이 거대한 감정적 기류는 사뭇 낯설어 보인다. 예전에는 여성을 무시하거나 불평등을 당연시하였을지언정, 이렇듯 집단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혐오를 고조시키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생존 그 자체가 버거워지면서 현실과 자아에 대한 불만이 특정 집단에 대한 적개심으로 표출되는 것인데, SNS 환경에서 그 심리가 쉽게 증폭된다.
그 저변에 무엇이 깔려 있는가. 기득권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데 대한 위기감, 거세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 같은 것이 아닐까. 이는 익명으로 악담을 쏟아내는 일베 등의 패거리에 국한되지 않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의외로 많은 남성들이 공유하는 정서로 보인다. 남성에게 지금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가. 여성과 평화롭게 접속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얼마 전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갈 곳이 없는 남자, 시간이 없는 여자]가 있다. 일본의 사회학자 미나시타 기류의 저서인데, 제목이 무릎을 치게 한다. 남편이 은퇴한 뒤의 부부의 모습을 떠올리면 금방 고개가 끄덕여진다. 집에만 있자니 답답하고 눈치도 보여서 바깥으로 나오지만 전철을 타고 정처 없이 떠돌거나 공원에서 하염없이 죽치고 있는 남자, 가사노동과 손주 돌봐주기에 분주하고 친구들과의 만남이나 여러 활동으로 하루가 꽉 차는 여자, 그 상반되는 일상이 어우러지기는 쉽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녀의 장벽을 넘어서 경험을 새롭게 빚어낼 수 있는 시공간이다. 노동과 소비의 이분화된 얼개를 해체하면서 삶을 창조하는 활동이다. 돈벌이의 도구가 아니라 저마다의 잠재력을 꽃피우는 ‘일’, 개인적 욕망의 해소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쁨을 누리는 ‘놀이’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맹목적인 경쟁에 저당 잡혀 있는 학습을, 자아를 만나고 서로를 살리는 ‘배움’으로 바꿔내야 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젠더라는 범주는 차별의 근거가 아니라 다양성을 발견하고 풍요로움을 북돋는 한 가지 조건일 뿐이다.
협동조합은 초기부터 그러한 공동성을 지향해왔다. 1844년 설립된 로치데일 공정 선구자 조합에서 여성 조합원에게도 동등하게 의결권을 주었는데, 이는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을 보장한 것(1928년)보다 훨씬 앞선 것이었다. ICA가 정립한 협동조합 7원칙 가운데 첫 번째로 일체의 차별을 배척하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천명한 것도 바로 그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협동조합은 여성들이 억눌리거나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마당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러한 진보성은 이제 저성장 고령화 시대를 맞아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다가 노후에 일도 없고 인간관계도 희박해진 남성이 인생 이모작을 멋지게 해나갈 수 있으려면, 그리고 자녀 교육에 대한 집착을 키우면서 사사로운 세계에 갇히기 쉬운 여성이 매력적인 생애를 가꿔가려면, 개인과 가족을 넘어선 차원에서 ‘사회’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 절박한 과제를 지금 협동조합의 일거리로 끌어안아야 한다.
여혐 현상에서 페미니즘이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여성 해방’ ‘양성 평등’ 등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핵심은 ‘젠더 프리’다. 즉, 남성과 여성이라는 범주를 절대화하지 않고 개개인을 고유한 인격체로 보는 관점이다. 그것은 나이, 국적, 피부 빛, 지위, 빈부 등의 범주들까지 상대화하는 운동으로 확장된다. 이는 당위적인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작업을 통해 실현된다. 사람과 사람이 협동하면서 자신과 타인을 새롭게 발견하고 또 다른 세상을 빚어가는 현장에서 가능한 것이다. 보편적인 인간과 사회적 관계를 지향하는 흐름 속에서 양성 평등은 자연스럽게 성취된다. 협동조합은 그 가능성을 두드리는 멋진 실험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