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칼럼]로치데일의 선구자와 마을

정광민 마을경제연구소 소장

협동조합인이라면 로치데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로치데일의 선구자들은 협동운동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원칙을 남겼는데, 마을과 협동운동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시사점이 풍부하다. 이 문제를 생각하는데서 참고가 되는 것은 G. J. 홀리요크와 G. D. H. 콜의 저작이다. 한 사람은 운동가로서 한 사람은 학자로서 각각 로치데일 원칙을 정리하였는데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홀리요크는 <로치데일 시스템의 14가지 특징>이라는 이름으로 원칙을 정리하고 여기에 마을을 사고하는 준거가 될 만한 부분을 포함시켰다. 즉, “협동조합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범죄와 경쟁이 없는 산업도시를 만든다.”는 것이다. 협동조합에 의한 상공업의 발전과 범죄와 경쟁이 없는 산업도시. 오늘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굉장한 아이디어다. 그런데 콜의 ‘로치데일 8원칙’에는 마을 또는 지역과 관련된 부분이 없다. 그렇다고 선구자들이 마을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콜이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은 선구자들의 ‘협동마을’에 대한 아이디어였다. 선구자들은 창립 규약에서 홈콜로니(home colony)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콜은 이를 협동마을의 건설이라 의미를 부여하고 이것이 협동조합의 기본 이상이었다고 기술하였다. 즉, 선구자들이 마을을 보는 관점(마을관)은 협동마을이었던 것이다. 협동마을은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땅에서 함께 살면서 그들이 만든 공장, 작업장, 또는 농장에서 일하고, 자본주의의 경쟁의 폐해에서 벗어나 상호부조와 사회적 평등, 그리고 진정한 인간애의 세계(새로운 도덕세계)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선구자들의 협동마을에 대한 아이디어는 로버트 오언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그 접근방법은 달랐다. 오언주의자들은 일정한 토지에 집결하여 바로 협동마을 건설에 착수했지만 선구자들은 토드레인에서 매장부터 열었다. 아마도 매장에서 협동마을로 가는 코스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선구자들은 매장경영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협동마을의 건설로 나아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콜에 의하면 1854년 무렵 협동마을의 이상은 사라졌다고 한다. 이 부분은 오언주의적 협동마을 觀에서 중대한 전환이 있었다는 것으로 읽힌다. 로치데일 선구자들이 협동조합을 창립한 시기는 ‘기아의 1840년대’였다. 1850년대 이후 ‘기아의 시대’는 지나가고 노동자들은 착실하게 생활이 향상되었고 定住性도 증대하였다. 위의 홀리요크의 ‘협동의 산업도시론’은 정주권을 중심으로 하는 협동조합적 마을 만들기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협동의 산업도시가 구체화된 것도 아니고 따라서 협동조합의 역할을 명시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로치데일공정선구자협동조합은 소비자협동조합으로서 기본적인 영역인 ‘거래’ 이외에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수행하였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의도적인 마을 만들기의 결과물은 아닐지라도 로치데일 마을에서 최대의 교육문화기관으로서 우뚝 섰다. 그리고 불황기 실업상태의 조합원들에 대한 금융상의 편의를 제공하면서 마을의 빈곤문제에 적극 대처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또한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것이긴 하지만 복지문제에도 적극 관여하였다.

영국 협동조합 초창기의 ‘협동마을’이나 ‘협동의 산업도시’는 이어지지 못했고 양자 사이에 뚜렷한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1995년 ICA가 제정한 7대원칙 중 커뮤니티 관여 원칙이 초창기의 협동조합 마을관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불명확하다.

그렇지만 마을의 협동운동을 길게 바라볼 때 협동조합의 상업과 공업에 의거하여 경제를 재편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호부조와 평등 그리고 인간애가 충만한 신사회를 만들겠다는 선구자들의 포부는 ‘마을’의 지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