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치데일공정선구자협동조합 탄생으로부터 100년
『영국 협동조합의 한 세기』 . G.D.H. 콜 지음, 정광민 역 | 그물코 2015.12.20
김형미, (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소장
협동조합은 그 자체가 진보적인가. 협동조합은 그 자체가 공리적인 가치를 창출하는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협동조합은 지구상에 출현한 다양한 형태의 사업체 중 하나이다. 좀 더 좁히면 유럽에서 탄생한 근대적인 경제조직 중 하나이다. 길드, 합명회사, 합자회사, 유한책임회사, 주식회사, 협동조합 등, 사업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12세기 지중해 상인들이 자본을 집중하고 출자관계를 구조화해서 생겨난 회사 형태가 진화하여 탄생한 주식회사가 더 흥미로운 문명의 고안품일지도 모른다. 협동조합은 씨족 사이의 자족, 부족 사이의 교환, 그리고 작은 지역 사회를 벗어나 타자와 결합하여 더 멀리까지, 더 큰 사업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업체 조직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18세기 중엽에 탄생한 협동조합이란 사업체는 합명회사처럼 그리 주목받지 못한 채 근근이 유지되는 존재로만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이상이 되었다. 어떻게, 왜? 협동조합은 점점 확장되는 시장경제, 점점 복잡해지고 자본이 집중되는 경제구조에서는 사업하기에 불리한 점이 더 많다. 그럼에도 21세기 협동조합은 지구상에서 10억 명 이상의 조합원과 1억 명 이상의 직원을 둔 경제 주체가 되었다. 주식회사처럼 사업하기에 유리한 구조는 아니지만 협동조합에는 그 단점을 보완하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게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길드 운동, 합명회사운동, 유한책임회사 운동, 주식회사 운동… 이런 말이 있을까? 아마도 이러한 표현을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협동조합운동’이란 용어는 있다. 협동조합운동은 19세기에 탄생하여 산업혁명의 무자비한 모순과, 20세기의 증오와 분열의 전쟁을 거치고도 계승되고 전파되면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21세기 협동조합은 윤리적이며 민주적인 사업체로서 쇠퇴한 지역을 살리고 변방에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다.
다시 묻는다. 협동조합은 진보적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협동조합 그 자체가 진보적이지는 않다. 그런데 협동조합운동은 진보적이다. 유럽의 도시 광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분수대와 식수대처럼 선의 가치를 사회에 아낌없이 공급한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정치, 사회, 경제 시스템을 보다 더 공정하게 만들어 가는 변화를 멈추지 않는 게 진보라고 생각한다. 진보는 선한 가치이다. 왜냐면 선, 또는 좋음은 사회의 생성과 유지, 발전에 기여하는 가치를 뜻하기 때문이다. 공공의 이익을 조성하는 게 선이라면 공동선을 해치는 것은 악에 속한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 제2부에서 무자비한 산업혁명기의 자본주의를 ‘악마의 맷돌’이란 윌리엄 블레이크의 표현에 비유한 것은 이에 통한다. 개인에게 유리한 행위라고 할지라도 공익을 해친다면 그것을 선하고 좋은 행위라고 부를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윤리학』에서 정치학의 목적을 “폴리스의 시민을 일정한 성격을 지닌 인간이 되도록, 즉 좋은 인간, 또 고귀한 행위를 하는 인간이 되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협동조합은 어떻게 진보적으로 되어갔는가. 어떻게 민주적이며 평등한 사람 중심의 의사결정구조를 지니게 되었는가. 어떻게 경제적으로 불리하고 약하며 때론 타락하고 사업의 능력도 없어보이던 노동자들을 교육하여 윤리적이며 유능한 경영자로, 민주적으로 행동하는 시민으로 만들어 갔는가. 협동조합은 어떻게 사업하기에 유리한 주식회사와의 경쟁에도 죽지않고 살아남아서 지구를 돌아 세계로 여행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협동조합에 ‘사상의 숨결’을 불어넣는 운동이 결합되어 협동조합운동이란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고 후세에 전했기 때문이다. 신체적으로는 불리했던 포유류가 멸종할지도 모르는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고 우연도 기회로 만들면서 유전자를 통한 종의 보전으로 생명을 영속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체는 소멸하지만 집단으로서의 종은 살아남는다.
『영국 협동조합의 한 세기』는 바로 이러한 역사 여행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 책은 로치데일공정선구자협동조합의 100주년을 기념한 1944년에 쓰였다. 2차 세계대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영국은 나치 독일과 치열하게 전투 중이었다. 광기어린 파시즘과의 전쟁 중인 국가 존망의 시기인데도 영국 협동조합운동의 한 세기 역사를 기록하여 그 운동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하려는 영국협동조합연합회(Co-operative Union)의 의지에는 비장함과 경의마저 느끼게 된다. 그 임무를 맡은 이는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지성을 지닌 민주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인 옥스퍼드 대학 교수 D.G.H. 콜(1889~1959)이었다. 홍기빈이 [추천의 글]에서 소개한 것처럼 콜은 ‘대단한 면모’를 지닌 지식인이자 실천가였다. 특히 1920년대 길드사회주의의 강령을 만든 이론가로서 협동조합운동의 민주적 발전을 강력하게 지지했던 그는 학문적인 영역에서는 성실하고도 냉철한 연구자로서도 높이 인정받았던 옥스퍼드 대 교수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필력은 노동운동사, 정치 팜플렛, 인물 평전, 탐정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이 책은 만년에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던 콜이 영국 정치경제의 변화와 노동운동, 정당운동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영국 협동조합운동의 전모를 폭넓게 그려낸 웅장한 작품이다.
협동은 신체적인 생존능력이 불리했던 인간에게 필수적인 생존양식이었다. 어느 지역에서나 협동을 체계화하고 사회적인 교감을 발전시키는 경제활동이 있었다. 그 중,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거대한 전환의 시기에 영국에서 탄생했던 협동의 방식은, 그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협동, 협동의 목적과 방향이 원대한 사회개혁운동으로 진화했다. 콜은 이 책에서 1760년대 영국에서 탄생한 일련의 협동 제분소, 스코틀랜드 펜윅 교구의 직공들이 교회 내에 설치한 공동 매장을 협동조합의 기원으로 삼아 184년 동안의 영국 협동조합의 탄생-성장-변용과 진화를 협동조합운동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그 기준이 되었던 것은 협동조합에 사상의 숨결을 불어 넣었던 로버트 오언과 상인자본가, 산업자본가와 달리 윤리적 가치에 기반하여 민주적이며 공평한 사업체를 성공시켰던 로치데일공정선구자협동조합이었다. 로치데일 선구자들의 성공은 복제 가능한, 보편적인 협동의 체계화, 요즘 말로 비즈니스 모델을 전파했다. 로치데일 선구자들이 도입했던 주요 방침, 예컨대 차별하지 않는 조합원제도, 1인 1표의 의결권, 공정한 자본 조달, 교육중시 등은 20세기에 국제협동조합운동의 원칙으로 정착했고 협동조합다움을 판단하는 준거가 되었다. 그래서 콜은, [서문]에서 이 책을 “로치데일 선구자들에게 바치는 협동조합 운동의 헌사”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그리는 영국 협동조합운동의 역사는 로치데일 선구자들의 성공이 ‘기아의 40년대’로 불리던 매우 혹독한 시기에 있었음을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나의 감상으로는, 이 기아의 40년대를 일부러 첫 장에 배치한 콜의 마음은 나치 독일과 전쟁을 치르던 1940년대를 견디던 시민들에게 보내는 연대의식처럼 보인다. 제2장부터는 19세기 협동조합의 성장과 20세기 협동조합의 변화를 시간적으로 다루면서도 협동조합과 법률(제7장), 협동조합 여성길드 (제12장), 협동조합인과 교육(제13장), 길드 사회주의와 건축 길드(제17장), 협동조합과 정치(제19장), 협동조합과 고용(제20장), 국제 협동조합 운동(제21장), 협동조합의 현재와 미래 (제22장), 라는 주제를 소개하고 있다. 이장의 내용은 지금도 팽팽한 긴장감과 함의를 던진다. 로치데일 선구자들은, 영국 협동조합인들은 성공만 하지 않았다. 그들의 실패, 내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때마다 부딪친 난관과 논쟁, 그 가운데서 발견한 새로운 방침과 개혁의 씨실과 날실…협동조합이란 ‘종’의 생존방식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에는 왜 국제협동조합연맹의 협동조합 정체성 선언의 협동조합 가치에 “조합원들은 선구자들의 전통에 따라서…”라는 문맥이 포함되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이 책의 구성은 22장. 본문만 675쪽이다. 콜이 사회운동에 투신하기로 맘먹었던 계기가 되었던 예술가 윌리엄 모리스의 문양으로 디자인 된 책표지는 그물코 출판사의 콜에 대한 헌사처럼 느껴진다. 책 두께가 베개로 삼을 만큼 묵직하다. 책을 안 읽는 이 시대에 이렇게 묵직하고 화제성도 없는 책을 펴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출판비용을 회수하기까지 무척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예수의 깨달음에 의지한다. 광야의 시험에서 이렇게 깨달은 후에야 빵과 말씀이 결합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낳았던 것처럼 개별 협동조합은 협동조합 운동의 ‘말씀들’에서 선배들의 경험을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또 그래왔다는 믿음이 이 책의 번역을 기획하게끔 이끌었다. 기획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번역 정광민, 출판 그물코. 2012년에 번역 출간했던『로치데일공정선구자협동조합: 역사와 사람들』에 이어 두 번째 협업 작업이었다. 부디, 협동조합운동의 고전을 음미하는 복된 시간을 여럿이 함께 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계간 <협동조합 네트워크> 71호(2016.1월호,한국협동조합연구소 발행)에 게재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