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경제학자가 던지는 마지막 질문, “아직 희망이 있을까?”

『불평등의 대가』 . 조셉 스티글리츠(경제학자) 저. 열린책들. 2013.05.30.

공정경, 아이쿱생협 언론활동팀

1년이 지났다.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가 작년 6월 출간됐다. ‘불평등’은 더는 비주류의 단어가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부자들의 모임이라고 불리는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서도 소득 불평등 문제는 중심 화두다.

저자의 목표는 소박하다. 불평등을 한 번에 없애고 완전한 기회의 평등을 달성하자는 게 아니라, 불평등의 수준을 완화하고 기회의 평등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과소평가>와 <과대평가>라는 바둑돌의 자리를 바꾸자고 제안한다.

“많은 미국인이 미국 사회 내 불평등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불평등이 실제보다 덜 심각하다고 보고, 불평등이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불평등에 대체하는 정부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불평등 개선책을 실행에 옮기는 데 드는 비용을 과대평가한다.”

먼저 책에 나오는 <상위 1퍼센트>라는 말은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가진 상층부를 일컫는 광의의 개념으로 쓰인다. 책은 두 가지 신화를 깨뜨리고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데 지면을 할애한다.

첫 번째, 하위 99퍼센트 소득층이 자신들이 상위 1퍼센트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으며, 상위 1퍼센트에게 이로운 것이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두 번째, 상위 1퍼센트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다른 세상을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고, 만약 상위 1퍼센트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면 나머지 사람들도 반드시 피해를 본다고 인식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다.

또한, 보다 역동적이고 효율적인 경제와 공정한 사회를 가질 수 있음을 논증하는데 할애한다. “기계가 잘 돌아가도록 터빈 위에 서서 위에다 기름을 쏟아 부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감추어져 있는 축이나 이음매에 기름을 조금만 쳐주면 다일 텐데, 그러자면 그것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명석한 경제학자는 사회가 잘 돌아가기 위해 경제개혁 어디에 기름을 쳐줘야 할지는 이미 명확하다고 말한다.

“금융 부문의 과도한 방종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킨 주역이므로, 개혁은 당연히 금융 부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문제는 상위 1퍼센트가 심어놓은 인식의 프레임을 깰 수 있느냐이다. 상위 1퍼센트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률의 성벽은 쌓고, 불리한 규제의 성벽은 무너뜨리면서 부를 축적해왔다. 경제영역을 넘어선 정치의 영역에 이용하여 <지대>라는 그들만의 철옹성을 넓혔다.

금융 위기가 발생한 직후에 그나마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정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 위기를 초래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고 경제 시스템을 신속하게 보수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몇 해가 흐르고 사람들은 분명히 깨달았다. 민주주의가 전혀 작동하지 않음을. 정치 시스템이 시장의 실패를 바로잡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시장의 실패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저자는 2011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쟈스민 혁명>,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같은 시위를 주목한다. 여론과 일반인의 의식, 그리고 정치인들의 의식을 바꿔 놓은 것만은 확실하고, 어찌 보면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아직 희망이 있을까?” 그리고 답한다. 약탈자를 위한 정책이 아닌, 99퍼센트를 위한 정책이 움직이도록 우리가 인식을 바꾼다면 희망은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국민에게서 멀어져가고 있지만, 다행히 우리는 민주 사회에 살고 있다고.

책을 읽는 소소한 재미 중 하나는 저자의 솔직한 심정이 불쑥불쑥 뛰어 나오는 대목들이다.

“열 살 때 온종일 나를 돌봐주던 다정한 여성이 초등학교 6학년을 마지막으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이 이처럼 부유한 나라에서 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는지, 왜 자기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나를 돌보고 있는 건지 참으로 궁금했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불평등과 차별과 실업과 경기침체를 보았다.” “서브프라임 사태는 가난하고 못 배운 미국인들이 약탈 대상으로 이용되어 나타나는 결과였다. (…) 가족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만, 상위 1퍼센트는 대부분 털끝만큼도 피해를 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다>는 말은 진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들이 <대단히 많은> 게 당연하다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대단히 큰 고통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가구들이 우리의 동정심을 자극하고 있는 데 반해 상위 계층 가구들은 날이 갈수록 우리의 노여움을 자극하고 있다. (…) 기업 경영진의 독창적인 능력에 대해 품었던 존경심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분노가 대신 들어섰다.”

아수라장인 현실 앞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고칠 방법은 정말 간단하다.”

100일이 지났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0일이 지났지만 울부짖는 피해자만 있을 뿐 속 시원히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의지가 없는 것이다. 누구의 의지가 없는지, 왜 의지가 없는지는 스티글리츠의 분석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희생자 가족의 눈물을 닦을 방법은 스티글리츠가 희망을 거는 바로, 우리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