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는 물음

『국가를 되찾자』 . 힐러리 웨인라이트 저. 김현우 역. 이매진. 2014.04.11.

공정경, 아이쿱생협 언론활동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 맞나?”

6월 11일 밀양송전탑반대농성장에 있던 여든 살 할머니 입에서 나온 질문이다. “우리 팔아먹은 이장은 당연히 죽일 놈 맞다. 그렇다 치고, 그 위에 똑똑한 정치인은 뭔가? 이장 꼬신 한전하고 시장하고 정치인은 뭐냐고…우린 이렇게 위험한지 몰랐다. 아무도 얘기 안 해줬다. 그냥 도장만 찍으라 했지, 이게 세워져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친절하게 얘기해주지 않았다. 한전은 그 피해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진즉부터 가지고 있었다….우리에게 얼마나 나쁜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우리한텐 얘기를 안 해주는데”

젊은 대학생도, 진보적 지식인도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를 겪을 만큼 겪은 할머니 입에서 나온 질문이다. 밀양송전탑, 철도민영화, 진주의료원, 사회공공성, 관피아, 신자유주의…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문제의 키워드들을 본질적으로 건드리는 질문이었다.

“아니요…민주주의 국가 아닌 거 같아요. 배우긴 그렇게 배웠는데, 투표만 한다고 민주주의는 아닌 것 같아요.” 답답함과 갈증이 커질 대로 커져, 대안의 모색 또한 더욱 과감하고 뾰족했으면 싶다. <국가를 되찾자> (힐러리 웨인라이트 저)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는 물음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 30년간 정치와 경제 권력의 균형추가 금융사기를 편드는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대중적 참여가 쇠락하는 동안 사기업의 권력은 성장했다. (…) 대의 민주주의는 성장하는 사기업의 권력을 따라잡을 수도, 고삐를 채울 수도 없었다. 또한 공중이 공공 부문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을 제공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p.72)

전통적 정치제도는 더는 국민을 대변하지 않는다. 낡은 정치제도의 위기이다. <국가를 되찾자>는 ‘지금 민중들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재창조하고 있는지’ 그 실험적 현장을 탐사한 책이다. 대의 민주주의를 넘어선 참여 민주주의의 사례들이다.

8장 ‘우리의 도시는 상품이 아니다’는 영국 뉴캐슬의 사례이다. 지자체는 ‘성장을 향하여’라는 구호 아래 기회만 있으면 공공서비스를 민영화를 하려고 한다. 공공 부문 노동조합인 UNISON이 지역공동체와 연대하여 공공 서비스를 지켜냈다. 또한, 이미 민영화된 서비스를 공적영역으로 되찾아온 예도 있다.

좀 더 적극적인 사례로 5장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리의 참여예산 제도가 있다. 다니에우 시장은 정치권력, 즉 시의 운영을 지역 공동체와 공유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믿었다. 주민은 행정의 대상에서 행정의 주체가 된다. 재정이 권력이고, 예산의 개방은 권력의 공유를 가늠할 가장 좋은 시험대라 여겼다. 주민들이 예산 우선순위 목록을 작성하고, 그 목록이 우선 이행된다. 이행율이 70%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참여 예산제도를 시행하면서 의회 부서에 압력을 가하던 사적 이해관계자들의 부패도 사라졌다.

저자인 힐러리 웨인라이트는 현장에 한번 가는 걸로 머물지 않는다. 4~5년 후 다시 방문한다. 여러 참여적 제도들이 좋은 결과를 내기도 했고, 잘 나가는 듯했는데 결국 실패로 끝나기도 했다.

책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민주적 통제’이다.

“지난 25여 년 동안 일어난 공공서비스의 민간 위탁이 가져온 결과는 공공서비스의 방향이나 서비스의 민주적 통제라는 쟁점이 공적 토론의 장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공 서비스의 경우 조달과 입찰 과정이 기술적이고 정치적으로 대중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민주적 통제라는 질문은 비가시적 영역으로 사라져버렸다. 지역개발 또는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토지 이용에 관련된 의사결정의 경우도 개발업자와의 은밀한 협상, 즉 상업적 영역 속으로 사라졌다. 의사결정의 과정은 민중들이 말할 수 있는 협의의 가시권 밖에서 진행된다.” (p.36 민영화 대 민주적 통제)

저자는 민주적 통제의 정당성을 지금까지 지배한 지식에 대한 두 가지 가정을 뒤집으며 찾는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인간의 지식은 불완전해서 우리가 하는 행동의 사회적 결과는 알 수도 없고 결과와 아무런 연관도 없다. 쉽게 말해 지식을 사회적 생산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초기 페미니스트 운동으로 시작된 여러 사회운동의 성과에서 지식의 정의를 새로 짠다.

“사회운동의 지식은 본성상 흩어져 있고, 제도 속에 뿌리박은 사상들뿐 아니라 감정이기도 했고, 글보다 행동 속에 들어있는 것이었다. 이런 지식은 언제든 곧바로 정책이나 요구로 전환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먼저 살펴보고 한데 모여져야 했다. 수평적 네트워크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지식을 공유했다.” (p.94 지식의 민주화)

여성운동의 경우 처음에는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모순을 너무도 많은 이들이 감정적으로 함께 느꼈다. 문제의 뿌리를 찾기 위해 서로 경험을 공유하고 반성했다. 이런 감정적이고 행동적인 것들은 이전에는 결코 지식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지식을 넘어 법과 제도로까지 만들어졌지만.

두 번째 가정은 ‘누구의 지식이 중요한가’이다. 구체적으로, 공적 의사결정과 조직에서 누구의 지식이 고려되는가? 이 질문은 한 국가의 민주주의 혹은 일상의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측정할 수 있는 측연(바다의 깊이를 재는 기구)이 된다. 저자는 공적 의사결정과 조직에서 민중의 지식이 우선되는 현장 그리고 우선되도록 노력하는 민주주의 실험을 기록한다.

의료민영화부터 밀양송전탑까지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의 시험대 위에 서 있다. 성공했든 실패했든, 이 책의 여러 사례는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최선은 공적 영역을 지키는 것이지만, 못 지켰다면 시민의 감시가 뚫고 들어가 제멋대로 못하게 하는 방법, 다시 찾아오는 방법까지 고민의 폭을 넓혀준다. 같은 죄목이라도 죄질이 같은 게 아니듯, 민영화라고 다 같은 민영화는 아니다. 선진국보다 우리나라의 여건이 질적으로 더 떨어진다. 선진국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민주주의도 어느 정도 함께 발전했지만, 우리나라는 자본주의만 발달했기 때문이다. 사실 갈 길이 더 멀다.

책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면 너무 직역식으로 번역한 문장이 때때로 거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