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어떤 것, 있는 어떤 것

『살아 숨쉬는 마을 만들기』 . 니시무라 이치로 저. 번역연구모임 연리지 역. 알마. 2013.11.22.

공정경, 아이쿱생협 언론활동팀

햇볕을 쬐고 싶다. 농사일에 항상 거무튀튀하고 거칠었던 할머니의 피부는 요양원에 들어온 지 채 6개월도 되지 않아 뽀얘졌다. 평생 가져 본 적 없는 하얀 피부다. 요양원이 상가건물 2층에 있어 몇 날 며칠을 기다려도 바깥 공기와 따사로운 햇볕을 직접 쬐기가 어렵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베지밀과 빵 한 조각을 손에 쥐여 드렸다. 눈치가 보인다. 할머니가 일을 저질러 10분 전에 침대 시트를 다 바꿨다며 원장이 연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한다. 손목을 보니 붉은 자국이 남아있다. 침대에 묶여 계셨나 보다. 십 수 명의 할머니가 거실 긴 의자에 앉아있다. 나란히 앉아있지만, 텔레비전만 응시할 뿐 서로 이야기를 나누진 않는다. 할머니의 표정에서 점점 희로애락이 사라진다. 갇혀있다시피 돌봐주는 요양시설이지만, 의료보험혜택을 최대한 받아도 매달 70만 원씩 들어간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뇌세포가 다 회색이 될 때까지, 몸의 세포가 다 멎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다. ‘예견된 비극으로 향한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을까?’ 책장을 넘긴다. <살아 숨 쉬는 마을 만들기 ? 미나미의료생협에서 배우는 협동과 돌봄>

일본 미나미의료생협의 요양시설인 그룹 홈‘나모’는 민가를 고쳐 만들었다.

“밤에 문단속하는 것 외에는 문을 잠그지 않아요. 입소자가 나가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 편한 장소가 되도록 직원들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밖에 나가 걸으면서 하체를 단련시키고 일광욕을 하면서 오감을 자극하죠.” (2장 돌봄과 복지)

치매가 있는 할머니도 이곳에서는 마음껏 바깥바람을 쐬고, 햇볕도 쬐고, 지나가는 이웃과 인사도 나누나 보다.

치매(痴?)는 어리석고(痴) 어리석다(?)는 뜻이다. 내 잘못으로 어리석어진 게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2004년 일본은 치매를 가치중립적 용어인 ‘인지증’으로 바꿨다.

인지증이라는 병은 어쩔 수 없이 민폐를 끼치지도 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면 인지증이 더 빠르게 진행된다. 그룹 홈 나모의 직원은 직접 도와주고 싶어도 가능한 한 참고 지켜본다. 대신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좋아하는 일은 어떤 것인지 가까이에서 관찰한다. 걸레 만드는 작은 일부터 비행기 타고 여행가기까지 좋은 경험을 쌓도록 목표를 함께 세우고 따뜻하게 응원한다.

미나미의료생협의 돌봄서비스도 초기에는 식사, 목욕, 배변 같은 신변 위주의 서비스였다. 인지증을 재인식한 후 방향을 바꿨다. 자립을 돕는 돌봄으로 의료와 지역이 손을 맞잡았다. 치매가 있는 노인이라도 안심하고 웃는 얼굴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목표다.

미나미의료생협은 1961년 미나미진료소로 시작했다. 현재는 병원 2개, 진료소 6개, 치과 1개, 그룹 홈을 갖춘 마을 2개, 단독 그룹 홈 1개 시설과 6만 3016명의 조합원, 332명의 자원봉사가 활동하는 규모로 발전했다. (2010년 기준)

저자는 미나미의료생협이 어떻게 지금같이 큰 조직이 됐는지 궁금해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100명이 넘는 사람을 만났고, 메모 노트도 4권이 넘는다. 들려주고 싶은 수많은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온전히 담는다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꼭 전하고 싶은 한 가지는 이것이다. 미나미의료생협은 이용자를 ‘관리’하는 게 아니라 자기답게 살 수 있도록 ‘응원’한다.

책은 미나미의료생협의 다양한 이용자가 어떻게 사는지 보여준다. 완화케어병동의 말기 암환자, 건강검진 받는 외국인노동자, 왕진으로 가난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 의사..

각 장의 이야기는 ‘환자 중심’이라는 의미가 실제로 어디까지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 기준이 되어준다.

X자로 휜 두 다리를 가진 라라라 씨와 물리치료사와의 대화이다.

“가나메병원에서는 환자 한 사람 한사람에게 어떤 목표를 가지고 노력할지 물어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상태가 되고 싶은지 알려주세요.” “남자랑 서서 키스할 수 있는 정도” “그럼 무릎을 펴야 하겠군요. 역시 젊다는 건 좋은 거야” (1장 의료)

다른 병원에서 라라라 씨는 고문과 같은 고통의 치료를 감사히 받아야 하는 대상이었다. 의사와 치료사가 치료의 주체였다. 하지만 미나미의료생협 장애인 재활 치료는 달랐다. ‘마음이 움직이면 몸이 움직인다’를 추구한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해 환자가 구체적인 목표를 스스로 정하고 치료를 하면 효과가 훨씬 좋기 때문이다.

근육장애로 입원 중인 사카키바라 씨가 연극을 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미나미생협 의료진은 곧 특별협동팀을 구성했다. 2시간 공연을 보기 위해서 한 달 동안 의료진뿐 아니라 극단까지 긴밀하게 협조한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 다른 때보다 더 긴장했습니다. 만일에 대비해 공연 중 긴급 알람이나 휴대전화가 울리는 경우도 고려해 연기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악의 경우 관람 중에 돌아가실 수도 있는데 연극을 대충대충 할 수는 없었습니다.” (4장 지역 만들기)

읽다 보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다.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현실에서 가능했던 비법은 커다란 한걸음이 아니었다. 미나미의료생협은 그저 오늘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모레가 좋아지도록 궁리했다. 얼굴을 모르는 만 명을 위해 움직인 게 아니라 가까운 한 사람을 위해 노력했다. 그 한 사람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누구와 무엇을 협동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현실에서 불가능하거나 없다고 해서 그것들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꿈을 꿔본다. 비록 고독이 흘러드는 곳일지라도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 숨 쉬는 그곳을 꿈꿔본다. 나의 할머니를 위해, 나의 엄마를 위해, 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