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퉁불퉁한 기록이 빛나 보이는 이유

『한국 생활협동조합운동의 기원과 전개』 김형미, 염찬희, 이미연 외 2명 저. 푸른나무. 2012.03.16.

이선옥, 생협평론 편집위원

“……우리 조선 사람이 아무리 궁핍하다 하더라도 소비조합에 10원 출자할 금전은 있으니 우리도 곳곳에 이런 조합이 생겨야만 아주 절명을 면할 것이다.”

강한 어조로 끝을 맺고 있는 위 글은 협동조합 운동을 독려하는 단체의 격문이 아니다. 뜻밖에도 거의 백 년 전 일간지 언론의 기사다. 1922년 동아일보는 11월 2일자 1면에 ‘소비조합’이라는 기사를 썼다. 동아일보는 영국의 ‘록델’(로치데일)시에서 시작한 공정선구자 조합을 소개하면서, “경탄할 만치 대규모로 경영을 하는” 영국의 소비조합 현황을 보도한다. 그리고 조선의 독자들에게 위와 같이 소비조합의 길을 독려하고 나선 것이다.

동아일보는 1932년, 창간 12주년 기념사업으로 ‘전조선협동조합조사(全朝鮮協同組合調査)’를 발표하기도 했다.

조선 인민들이 살 길을 주창하는 단호한 어조는 민족정론지로서 자존심을 지키던 때 동아일보의 정신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 생활협동조합이 뿌리를 찾는 이 책에서 나는 오히려 예전 동아일보의 기개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의 동아일보를 생각하면 탄식이 나올 뿐이지만…

흔히 협동조합 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산물로 여긴다. 한국 사회는 오랜 시간 군사독재 정권의 지배를 받았고, 그 아래서 시민들의 조직적인 활동은 모두 금지되었다. 민주화 운동으로 그 억압의 시간을 끝낸 후 그간 눌려왔던 사회적인 욕구가 다양하게 분출되었다. 계급운동, 시민운동,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등 각 분야별 운동이 활발하게 조직되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들 중 한 갈래로 협동조합도 태동한 것이라고, 나도 생각했다.

이 책은 그런 편견을 입체적인 역사를 통해 깨트려준다. 한국 생협운동의 역사는 민주화운동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의 어느 대목을 펴더라도 협동조합 운동의 뿌리가 민주화운동 이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오히려 일제시대부터 끈질기게 내려온 이런 운동들이 잔뿌리가 되어 결국 민주화운동이라는 결실을 맺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한국생활협동조합운동의 기원과 전개>(김형미 외, 푸른나무)는 한국 생협운동의 뿌리를 여러 갈래로 더듬어보는 책이다. 저자들은 현안에 대응하느라 바빠 뿌리를 찾아 볼 여유조차 없는 현재에 대한 반성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라고 말한다. 이 책은 연도별로 정밀한 기록을 훑어 사료화한 학문적인 책은 아니다. 각 저자들이 관심 있는 주제를 정하고 해당 분야의 뿌리를 찾아 자유롭게 기록한 형식이다. 그래서 주제도 다양하고 쉽게 읽을 수 있다.

식민지시대 소비조합운동의 궤적, 노동운동과 소비조합, 여성 소비조합 운동, 점포형 소협의 역사, 강원도라는 지역의 생협운동 등 저자들의 말대로 ‘울퉁불퉁’한 조합들이다. 이 책의 집필 방식이 ‘협동조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역생협 활동가, 직원, 연구자, 외부 연구자 등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는 분들이 모여 만들었다. 자신이 발굴하고 싶은 주제를 정하고 힘닿는 데 까지 자료들을 찾아 분야별 ‘소사’를 퍼즐조각처럼 끼워 맞추었다. 특이한 건 이들에 대한 소개에 모두 자신의 전문적인 이력보다 어디 지역생협에서 조합원 활동을 시작했는지를 중요하게 쓰고 있다는 점이다. 협동조합의 조합원이라는 정체성이 이 울퉁불퉁한 기록을 더 빛나 보이게 하는 이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시절 동아일보가 무척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