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자존감을 위하여
김찬호, (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연구위원
어느 워크숍에서 강사가 재미있는 프로그램 하나를 내놓는다. 50 여명의 참가자들에게 풍선을 하나씩 나눠줘 불게 한 다음 거기에 자기의 이름을 써넣도록 한다. 그런 다음 옆에 있는 빈방 안에 그것을 모두 집어넣도록 한다. 그리고 제한된 시간 안에 각자 자기의 풍선을 찾는 게임을 하도록 한다.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참가자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풍선들을 뒤적이지만 서로 부딪히고 발을 밟고 우왕좌왕하기만 한다. 자기 풍선을 찾아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사가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 아무 풍선이나 하나씩 집은 다음에, 거기에 쓰여 있는 이름을 확인하고 주인을 찾아가 건네주는 것이다. 그렇게 했더니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자기의 풍선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생물학적으로 매우 취약하다. 그런데도 이렇듯 어마어마한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사회성 덕분이다. 탄생할 때 극도로 미숙한 상태여서 어미가 돌보아주어야 하는 기간이 매우 긴데, 성인이 되어 부모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의존 성향은 평생 지속된다. 다만 그 대상이 혈연을 넘어서 일반적인 타인으로 확대될 뿐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자연 상태에서 도저히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가족 단위로도 위태롭다. 적어도 150명 이상의 집단을 이루어야 최소한의 효율적인 분업이 가능하다. 협동 능력은 인간의 핵심적인 생존 비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능력이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는 듯하다. 어느 고등학교 교사의 경험이다. 학급의 한 학생이 할머니의 상을 당해 중간고사를 치르지 못했다. 그래서 학칙에 따라서 기말고사 성적에 준해서 점수를 주기로 했다. 그러자 많은 학생들이 와서 교사에게 부탁을 하더란다. 기말고사 시험 문제를 중간고사보다 어렵게 출제해달라고. 만일 중간고사보다 쉽게 출제하면, 그 학생에게 매우 유리해지고 결과적으로 자기들은 불이익을 본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신이 중요한 입시 시스템 속에서 친구를 오로지 경쟁상대로만 바라보게 되는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저마다 폐쇄적인 개인들로 분절화되고 서로에게 적대적인 심성을 키우는 가운데, 우리의 삶과 사회는 점점 황폐해진다.
관계는 품성을 빚어낸다. 서울시의 자활 담당 공무원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노숙인들의 일거리를 찾다가 발달 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하도록 했다. 장애인들은 노숙인들을 ‘선생님’이라도 부르면서 따라다녔다고 한다. 노숙인들은 평생 그런 호칭으로 불리거나 그렇게 깍듯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타인으로부터의 존중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인격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주어졌다. 사뭇 거칠었던 분들이 그 활동을 몇 달 하면서 매우 부드러운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이 다양하게 실험되고 있다. 그 핵심은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고 그 기반 위에서 경제적 관계를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전자의 작업이 없이 후자의 기획은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참여자들의 자존감이 건강하게 다져져야 한다. 그것은 공동의 삶을 빚어가는 과정과 순환적으로 맞물려 있다. 자존감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와 함께, 내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의해서 형성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로 귀결된다. 자존감은 개인의 내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과제인 것이다. 무력한 약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도모하고 더불어 더 나은 삶을 빚어가는 능동적 주체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은 그러한 사회적 자존감을 북돋아주는 운동과 병행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