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개혁과 신임 조합장의 할 일
장상환, (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연구위원
지난 3월 11일 농협조합장 동시 선거가 끝났다. 농협 조합장 1,109명 중 517명이 신임 조합장에 당선되었다. 46.6%의 조합장이 바뀐 것은 농협의 변화를 바라는 농민들의 열망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좋은농협만들기 정책선거실천 전국운동본부’(운동본부)가 제안한 농협 개혁과 정책선거 실천을 다짐하는 협약에 서명한 후보 187명 가운데 60명이 당선되었다. 당선자 60명에는 농협 현직 조합장 가운데 지역조합과 농협중앙회 혁신을 깃발로 내걸고 작년 2월 창립한 ‘정명회’ 회원 6명도 포함돼 있다. 전체 당선 조합장 가운데 협약 서명 조합장 수는 미약하지만 현장에서 농협개혁을 추진할 동력을 확보한 것은 큰 성과다. 운동본부는 ‘좋은농협만들기 전국운동본부’라는 상설조직으로 전환하여 농협개혁을 꾸준히 추진해나가기로 했다. 새로 당선된 조합장들이 농협개혁에 적극 나서기를 기대해본다.
현재 농협은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다. 누구를 위한 농협인가. 농협법 제1조는 농협의 존립 이유로 ‘농업인의 자주적인 협동조직을 바탕으로 농업인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농업의 경쟁력 강화를 통하여 농업인의 삶의 질을 높이며, 국민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에 이바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여기서 크게 동떨어져 있다. 누구에게 농협에 취직한다고 하면 일반 금융기관에 취직하는 것과 같다며 축하해줄 것이다. 농협 경제사업과 신용사업을 분리해서 농민을 위한 경제사업을 강화하자는 농민의 아우성은 정부와 농협의 교묘한 비틀기 결과 허무하게도 지주회사 방식의 분리로 끝나고 말았다.
농협금융지주는 계속 각종 금융회사를 인수하여 사업 규모와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일반 금융기관에 뒤떨어진 것을 만회하고 경쟁하기 위해서란다. 중앙회 신용사업은 원래 농민 아닌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은행으로 출발했다. 이제는 은행을 넘어서서 보험, 증권, 투자자문 등 종합금융그룹으로 나아가고 있고, 농민조합원의 손을 거의 벗어났다. 지역 농협 신용사업도 비슷하다. 지역농협 상호금융은 신용조합법에 근거해서 영업한다. 그런데 신용조합은 조합원만을 대상으로 영업하는데 지역농협 상호금융은 농민조합원을 넘어서 일반시민도 준조합원이라는 자격을 얻어 이용할 수 있다. 실은, 일반은행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농협의 농산물 판매사업은 농민들의 염원과 너무나 거리가 멀다. 농산물 시장의 주도권은 종전에는 도매상인이 쥐고 있었는데 지금은 대형마트가 주도하고 벤딩업체를 매개로 생산농민들을 수직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농협판매사업은 대체로 도매시장까지 농산물을 실어다주는 수동적 역할에 그치고 있고 시장가격 결정에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중앙회 경제사업도 생산자인 농민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경제사업체 자신의 경영수익 극대화에 주력한다. 경제지주사의 하나로클럽은 대형마트와 거의 차별성이 없다. 최대한 염가로 구매해 일반소비자들에게 저렴하게 팔아야 다른 대형마트와 경쟁할 수 있다. 농민과 거래할 때 당연히 갑의 위치에서 농민경영을 압박한다. 대도시나 중소도시 지역 농협의 하나로마트 역시 일반 대형슈퍼마켓(SSM)과 별 다름없다. 경제지주사는 최근 물류사업에까지 진출하려 한다. 그나마 다소간 협동조합다운 활동을 통해 농민조합원에게 봉사하는 것은 원예농협이나 축협 등 품목별 조합의 농축산물 공동판매사업과 농자재 공동구매사업이다.
현재의 농협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은 심하게 말하자면, ‘농민 이름 팔아 농협 임직원 잇속 챙기기’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완벽한 주객전도인 셈이다. 작년 농업계가 겪은 가장 큰 문제는 채소가격 폭락이었다. 여기에 대응해 농협은 대체 무슨 역할을 했나.
이제 농협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농산물 제값받고 팔기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한다. 농협 경제사업은 농민들이 판로와 가격을 걱정하지 않고 생산할 수 있도록 공동판매조직을 구축해 강력한 시장교섭력을 갖추어야 한다. 원예농협과 축협 등 품목별조합의 성과를 확대하는 방향은 다양한 품목별협동조합연합회를 조직해 구매대상이 대형마트든 생협이든 헐값으로 농산물을 판매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지난해 풍작으로 각종 과일과 채소가 과잉생산되어 가격이 폭락하는 사태를 맞이해 농민들은 모두 가격안정과 농가수입 증대를 가져올 수 있는 유통조절명령제의 도입을 원한다. 유통조절명령을 통해 생산조절과 출하조절을 하면 과잉생산과 가격 폭락을 막을 수 있다. 농민들의 상식이자 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부로 하여금 해당 작목에 유통명령제를 발령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해당 생산농가의 사업 참여와 출하조절 이행 등을 이뤄낼 품목별 생산자단체의 역할이 핵심적이다. 제주도에서는 몇 년 동안 지역협동조합과 감귤협동조합이 협력하여 감귤 출하조절을 담당하여 규격 미달 감귤의 출하 금지와 감귤가격 안정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생산자가 전국에 산재한 여러 채소와 과일의 경우 전국 각 지역 생산자단체들과 지자체들이 협력체를 만들고 중앙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내야 한다. 전국 차원의 품목별협동조합연합회 또는 품목별 연합판매조직을 결성해야 가능한 일이다. 실로 대단히 어려운 과제다. 신용사업은 농민조합원들의 협력적 생산과 농산물 공동출하를 지원하고 안내하는 지도금융이 되어야 한다. 대도시 하나로클럽과 하나로마트 등 농민조합원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고 매각하여 그 재원을 농민대상 사업 개선에 투자해야 할 것이다.
농협개혁의 근본 동력은 농민조합원과 회원 농협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농민이 가만히 있는데 정부나 여야당이 농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농협개혁을 할 리 만무하다. 농협이 어떻게 되든 농민 각자 살길을 찾아 허둥댈수록 자본의 지배에 더욱 깊이 끌려들어간다. 조직화된 협동조합으로 시장교섭력을 갖추지 못한 농민은 생협한테도 을의 지위로 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이번에 당선된 조합장 당선자들은 전국적으로 협력하여 조합원들이 요구하는 연합판매조직 구성과 유통명령제 도입을 앞장서서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농민조합원들의 의지와 힘이 모여야 한다. 이를 위해 개혁파 조합장들은 조합 운영 실태를 조합원들에게 공개하고 해야 할 사업에 대해 조합원들의 의견을 묻고 중요 의사결정에 조합원을 참여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연구자들의 협력을 얻어 외국 농협의 농산물 판매 실태도 조사하고, 그 동안의 소규모 연합판매조직의 경험들을 정리하며, 사업수행을 위해 법령과 정관 중 개정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밑으로부터의 민주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이 쌓일 때 비로소 지주회사 방식의 신경분리라는 위로부터의 허구적 개혁을 넘어 농민들의 오랜 염원인 실질적인 농협개혁이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