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하고 연구를 해야하는 이유
염찬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연구위원장)
2015년 최저시급 5,580원이란다. 서울 시내에서 점심 한끼를 해결하려면 6천원은 필요하다. 중키의 젊은이가 겨우 한 몸을 누일 수 있는 고시원의 한달 임대료가 30만원이 넘는다. 이공계쪽 등록금은 년 1천만원 정도이다. 이러한 경제 상황에서 젊은이들의 정치적 보수화 경향은 당연하다. 생존을 위해서 온 에너지를 다 쏟아야하는 그들에게는 사회구조를 들여다 볼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현재에서 탈피하는 것과 자신의 안위만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해진다. 구조는 유지된다. 악순환이다. 힘들어도 세상을 알아야하며(공부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히려(연구) 해야한다. 그래야 세상이 바뀌고 모두가 편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서 곧잘 둘로 분류한다. 이분법적 분류는 더러 과격하고 천박할지라도 그 이상 명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도 여기에서 해보자. 두 가지만.
우선, 세상에는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한 단계 더 나누면,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들 중에는 정의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권력과 밀착된 불의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두 부류가 있다.
“제가 어렸을 때 촌에서 자라서 그 새끼 송아지를 먼저 팔면 어미소나 아빠소가 밤새도록 웁니다. 그냥 하루만 우는 것이 아니고, 일주일 열흘을 끊이지 않고 웁니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고 막 끊어질 듯이 웁니다. 그러면 적어도 제 기억에는 새끼 소를 팔았던 우리 삼촌, 우리 동네 아저씨가 그 다음날 아침에는 담배 하나 피워 물고 소죽을 더 정성껏 끓였고 영문도 몰랐지만 동네 아이들은 그 소 앞에 가서 지푸라기 들고 뭐라도 먹이려고 했어요.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고, 어떤 이웃도 어떤 사람도 저 소새끼 왜 우느냐고 하는 적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소에게도 짐승에게도 그렇습니다. 적어도 그 소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요. 기한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 슬픔이 멈추는 날까지 그때까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향신문의 정제혁기자는 인간됨의 중요한 성정인 공감력이 탁월한 인물로 방송인 김제동을 꼽았는데,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위한 토크콘써트에서 김제동이 한 위의 말을 근거로 해서다. 김제동 말고도 우리 주변에는 공감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훌륭한 인간됨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닌 경우도 많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찾고자 하는 유가족의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하지만 집권자의 고통에는 참으로 탁월한 공감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공감의 방향이 올바르지 못하면 오히려 사회를 분열시키는 해악을 저지른다.
이분법적 분류, 또 하나. 세상에는 주체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과 식민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두 부류가 있다.
대학원 석사과정 입학을 위한 면접 때의 일이다. 필기시험은 이미 치른 상태였고, 특별히 문제가 있지 않는 한 면접이 당락을 결정하지는 않는 전통 때문에 면접장의 분위기는 긴장감없이 화기애애했다. 이런 저런 사소한 질문들 끝에 한 선생님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왜 대학원에 들어오려고 하는거지?”라고 질문하셨다. 나는 일각의 지체없이 대답했다. “세상을 보는 눈을 바르게 갖고 싶어서입니다.” 자본과 국가권력이 한 개인의 일상 사유를 식민화하는 상황에서 주체적인 사유를 확보하고 견지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조를 바라보는 공부를 하고, 나아가 사회구조의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즉 진리를 밝히는 연구를 하는 능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기에 쉽게 나올 수 있던 답이었다. 나의 연구의 원칙들, 즉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닌 실학이 나의 연구의 이유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원칙, 그리고 나의 시좌(視座)를 올바르게 잡아야한다는 원칙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마주치는 다양한 모습의 지식인들로 인해서 매번 다잡게 된다.
4대강 사업이 대한민국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변하거나, 세월호 참사 유가족에게 밥그릇 운운하면서 비난하거나, 국가 차원의 재앙이 벌어졌는데 책임져야 할 지도자가 국가원수이므로 근무시간에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안보’ 차원에서 비밀로 부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고함치는 사람들…놀랍게도 그들은 못배운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을 박노자는 권력유착의 ‘학피아’라고 부른다. 그들은 주체적인 사고를 하고 사람들이 혹할 논리도 만들어낸다. 그들을 볼 때마다, 공감능력을 키우고 주체적인 사고를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두는 곳을 올바른 위치에 잡았는지를 끊임없는 공부와 연구로 확인하고 조정하도록 경계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