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것이 강해지는 협동의 역설
이영환(성공회대학교 교수, 사회복지학,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연구위원)
지난 여름 귀여운 손녀가 태어났다.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행복한 일이지만, 덕분에 온 집안이 육아 시스템으로 변신했고, 부모가 모두 직장인인지라 필자 역시 그 일익을 담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 역할은 물론 보조적인 것이지만 주관적인 부담은 만만치 않다. ‘황혼 육아’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했다는 선정적인 언론 보도가 있을 만큼 엄청난 부담이지만, 귀여운 손녀로 인해 밤잠을 설치고, 할 일을 제 때 못하고, 외부 약속도 자꾸 기피하고 하는 정도는 행복한 비명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아이의 행동 하나 하나, 그리고 조금씩 성장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세상의 이치를 새삼 깨닫는 덤도 얻는다.
실로 갓난아이를 돌보고 키우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세상의 모든 어버이가 그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종족보존의 사명감에서일까? 그보다는 그야말로 아이가 사랑스럽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가 사랑스러운 것은, (모리 교수가 얘기하듯이) 자신의 생존자체를 온전히 의지해 오는 연약한 생명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생명과 생존을 온전히 의지하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어린 생명체를 품 속에 꼭 안아보지 않은 사람은 잘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존을 타인에게 온전히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 ! 그렇다. 어린 아이는 사랑스럽지만 정말 허약한 존재이다. 아마도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허약한 것이 인간의 초기 생명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렇게 연약한 생명체가 모든 만물 중에서 가장 강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떤 인류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의 불안을 극복하고 지구의 정복자로 정착하게 된 중요한 비결은 고유한 육아 시스템을 창안한 덕분이라고 하는데, 그 시스템은 곧 조부모가 손자녀를 돌보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자식을 돌보고 양육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대를 건너 띄어서 조부모가 손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협력 시스템이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한 비결이었다는 것이다. 즉, 부모와 조부모 나아가 종족 전체의 협력 시스템이 인간 생존의 비밀인 셈이다.
이러한 협력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너무나 허약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오랜 기간 타인의 돌봄에 의지해 간신히 생존을 유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스레 협동의 비밀을 터득했을 것이다. 이렇듯 가장 약한 인간을 가장 강하게 만드는 협동이야말로 곧 인류 문명의 비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근 아이쿱생협이 번역 소개한 로치데일 공정선구자조합의 역사 또한, 약한 것이 강해지는 역설의 진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선구자들은 당시의 보통 노동자들처럼 가난하고 힘없고 착취당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에 불과했지만, 협동의 비밀을 자각하면서 자본주의 세계 역사에 뚜렷한 대안을 보여주는 영웅적인 존재들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협동이 어떻게 가능했고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선구자들의 인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궁핍을 벗어나기 위해 협동조합을 시작했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고, 초라하기 그지 없었던 출발 초기부터 자신들의 문화적, 정신적 고양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각종 신문을 구독하고 도서관을 만들면서 이들은 노동자로서 그리고 협동인, 문화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자부심을 함께 키워냈다. 이렇듯 선구자들은 자신과 동료들을 존엄한 인간으로 자각함으로써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 역사적인 발걸음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은 존엄한 존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