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늙어가는 사회를 꿈꾼 사람과 그 후예들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산업경제학과)
돈은 종종 혈액에 비유된다. 인체의 피가 세포들에 ‘산소’를 전달해주는 매개체라면, 사회 속의 돈은 경제활동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가치’를 전달해줌으로써 그 활동을 촉진하는 매개체이다. 이때 돈은 경제의 곳곳을 누비며 다양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활동을 도울 때 비로소 본연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그런데 돈은 피와 달리 자기증식의 논리가 있다. 돈 그 자체가 목적이 됨에 따라 어떤 곳에는 돈이 너무 많이 몰리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어떤 곳에는 돈이 턱없이 부족해지기도 한다. 즉, 돈이 생산적 활동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경제 현장으로부터 ‘퇴장’하거나 사람들의 삶이나 진짜 경제와는 무관한 투기적 공간으로 진출하는 일이 언제부턴가 당연한 일처럼 되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돈이 부족해진 진짜 경제는 활동이 위축되고 실업자가 늘어나며, 돈이 넘쳐나게 된 가상의 투기적 공간은 거품을 부풀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돈을 본연의 위치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위대한 경제학자들은 어떤 답을 제시했을까? 맑스는 자본이 노동을 고용해 생산을 주도하고 잉여가치를 최대한 뽑아가는 상황에서는 단순히 화폐제도를 고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케인스 역시 돈이 목적의 자리에서 수단의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한 참신한 해법은 오히려 경제학계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 내놓았다. 오스트리아에서 철학자이자 사회개혁가이자 신비주의 사상가로 활동했던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와 독일에서 사업가이자 경제학자로 활동했던 실비오 게젤(1862-1930)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화폐와 금융의 문제를 동시대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으며, 돈에 사회적 생명과 수명을 명시적으로 부여함으로써 자기증식 능력을 제한하고 이를 통해 돈을 본연의 위치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믿었다. 즉 돈도 인간처럼 태어나고(=발행되고), 늙어가고(=가치가 떨어지고), 세상을 떠나도록(=가치가 없어지도록) 함으로써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기본 발상은 소위 ‘화폐 노화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법은 돈의 가치가 예컨대 매달 10%씩 떨어지도록 규정한다. 그러니까 신권 10만원은 한 달이 지나면 9만원으로, 두 달이 지나면 8만원으로 그 가치가 계속 떨어지며, 열 달이 지나면 그 가치는 0원이 된다. 이 법이 적용되는 세상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돈이 노화해 그 가치가 줄어들고, 수명 또한 10개월로 제한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하루 일하고 거래 상대방으로부터 신권 10만원을 받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제 이 돈을 투자해 더 많은 돈으로 돌려받는다는 발상이 사라질 터이다. 그리고 외식을 하거나 문화생활을 늘리거나 집수리 등을 해서 새로 생긴 돈의 구매력이 줄어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써버리려 할 것이다. 이처럼 돈이 퇴장하지 않고 ‘진짜 경제’ 내에 계속 돌면서 빠른 속도로 경제활동을 매개하게 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의’ 경제도 좋아지고 사람들의 다양한 창조적 활동도 늘어날 게다. 물론 세상에 ‘노화하는 돈’, ‘감가하는 돈’만 있다면 저축이 의미를 잃을 테고 많은 자금이 은행에 모일 수 없게 되어 대규모 투자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슈타이너와 게젤이 전국적 차원에서 발행·운영하는 전통적 통화부문과 돈의 노화 원리에 기반해 지역마다 자율적으로 발행·운영하는 대안적 통화부문이 공존하는 이원화된 화폐시스템을 제안했던 것도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서였다.
이들의 참신하고도 도발적인 해법은 현실에서는 끝내 수용되지 못했다. 이들의 사상 또한 철학이나 경제학에서 주요한 학파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은 1920년대 중부 유럽에서 맑스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의미 있는 정치적 대안으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70년대 초를 기점으로 사회적 금융의 물꼬를 트는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이들의 지난한 실험이 없었다면, 지난 수십년 동안 더디지만 꾸준히 확산되고 있는 지역통화 운동이나 대안적 금융기관들의 다양한 실험들은 세상에 선을 보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특히 오늘날 유럽이나 미국의 사회적 금융기관들 중에는 슈타이너의 아이디어에 기반하고 있는 곳이 많다. 독일의 GLS 은행이나 네덜란드의 트리오도스 은행, 스웨덴의 생태은행이 대표적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사회적 금융을 위한 루돌프 슈타이너 재단”처럼 아예 그의 이름을 직접 붙인 금융기관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 금융기관들은 돈이 보다 가치 있게 쓰일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한다. 전통적인 은행과 금융이 가치의 문제를 경시했다면, 사회적 금융은 의식적인 소비자, 윤리적인 투자자, 계몽된 사업가, 문화적 창조자, 비영리단체 등을 매개로 사람(People), 환경(Planet), 이윤(Profit)이라는 세 가지 최종 목표를 같이 추구한다. 앞으로도 사회적 금융은 사회적 경제가 현실에 튼튼히 뿌리내리는 데 소중한 동반자로 함께 할 것이다.
추신: 피트 시거라는 미국의 전설적인 포크송 가수가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떤 이는 이 사람을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과 비교하기도 했다. 미국 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에 항상 있었던 포레스트 검프 말이다. 매카시의 빨갱이 사냥, 흑인 인권운동, 반전 운동, 이라크 전쟁 반대 현장에 ‘밴조를 메고 노래하는’ 피트 시거는 항상 있었다. 물론 그의 경우에는 그 현장을 우연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찾아갔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피트 시거는 심지어 아흔이 넘은 나이에 지팡이를 짚고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에 참가하기까지 했다. 자본에 굴복하지 않고 권력에 맞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피트 시거의 삶은,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슈타이너나 게젤과 공명하는 바가 적지 않다. 유투브에 있던 많은 노래들 중 유독 내 가슴을 울렸던 노래가 있다. 젊은 시절의 그가 불렀던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이다. 새해를 맞이해 아이쿱생협 식구들도 같이 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