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과 열매

이정주, (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이사장

한 여인이 새로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무엇을 파느냐고 묻자 주인은 “당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팝니다.”라고 했죠. 그래서 여인은 ‘최고의 것’을 사기로 마음먹고 이런 것들을 주문합니다. “마음의 평화와 사랑과 행복과 지혜,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세요.”

그러자 주인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죠. “미안하지만, 가게를 잘못 찾으신 것 같군요. 이 가게에서는 열매를 팔지 않습니다. 오직 씨앗만을 팔지요.” 가게의 주인은 다름 아닌 신이었습니다. 틱낫한 스님의 글입니다. 열매는 수고로움 없이 얻을 수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씨앗은 땅 속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열매를 맺기 까지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협동조합도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 선구자들의 노력으로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또 많은 활동가와 경영자들의 노력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성공적인 협동조합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열매가 다시 씨앗을 낳고 다시 열매를 맺으며 ‘협동의 경험’을 공감하면서 세대를 이어가야 비로소 성공적인 협동조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속한 아이쿱양천생협이 오랜 기다림 끝에 얼마 전 제3 매장을 내었습니다. 그 매장이 위치한 곳은 마침 생협 초기부터 자리 잡기까지 함께 애써왔던 초기 활동가들이 많이 모여 있는 동네입니다. 바로 아파트 ‘9단지의 그녀들’이 있는 곳이지요. 한동안 아이들을 키우느라 활동을 접고 가정으로 돌아갔던 그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픈 날 매장에 가보니 그 가운데 한 친구가 2층 카페에서 하얀 브라우스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래층 카운터에는 또 다른 친구가 예쁜 미소로 조합원들을 응대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선장이 오랜만에 배 운전대를 잡은 것처럼, 다소 긴장했지만, ‘여기는 우리가 접수한다’는 주인의식이 발동하면서 곧 바로 적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을 더욱 흐믓하게 한 것은 그 다음 풍경입니다. 아직 아이들 점심거리라도 챙겨주어야 하는 젊은 활동가들이 빵코너에서 하루종인 열심히 우리밀을 홍보하고, 매장 입구에서는 이벤트 홍보 전단지를 나누어 줍니다. 그런가하면 이벤트 상품을 챙겨주고 조합원 가입을 안내하고 빵포장을 돕고, 이런저런 급박하게 돌아가는 매장에서 각자의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먼저 앞서 고민하고 또 그 다음 세대가 매장을 만들고 다시 그것을 한 공간에서 함께 채워 가는 ‘협동의 경험’을 공감하는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며칠 전엔 우리 지역 한 살림 지부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지부장님이 제게 핸드폰 속의 사진 하나를 보여주셨습니다. 전임 이사장님들이 의기투합하셨다면서요. 이제 일선에서 물러난 선배 활동가들이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아이들 돌봄 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개원날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사진 속에는 선배 활동가들이 죽 늘어서서 기뻐하며 웃고 계셨습니다. 또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후배 활동가들에게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리고 세대를 잇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함께 공감하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날은 마침 서울지역협동조합협의회가 창립 총회를 가진 날이었습니다. 신협이 함께 하게 되었다는 점도 의미가 있지만, 그 날은 기존의 생협들을 포함해서 새로운 협동조합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협동조합 발전을 이해 한 마음을 모았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협동조합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의 씨 뿌리는 수고로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의 열매 속에는 또 다른 씨앗이 숨어 있듯이, 기존의 협동조합들과 새로운 협동조합들이 뿌리고 가꾸고 다시 열매를 맺는 순환 고리 속에서 발전하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