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청춘’에서 ‘거듭난 청춘’으로

이정옥(대구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88만원 세대’ ‘아픈 청춘’으로 20대가 사회에 호명되고 있다. 졸업 후에도 막막한 앞길 이라는 현실 때문에 소통과 공감, 위로, 멘토링, 통계 숫자 등을 가지고 기성세대는 20대에게 다가서고 있다. 20대는 새로운 유권자이면서 새로운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대에게 다가서는 소통과 공감이라는 용어의 정치적 대표자는 신자유주의 질서의 틀을 만든 레이건이었다. 레이건은 소통과 공감어법을 구사하여 탈규제, 감세로 대표되는 자유 시장 정책을 아메리칸 드림으로 미화하였다. 그는 위대한 스피커로 불리운다.

소통과 공감어법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이 ‘ 여론조사’이다. 심지어는 정치인도 아닌 사람도 연일 여론 조사 대상에 등장하면서 연말 대선 후보의 반열에 오르내리고 있다. 마크 트웨인은 이 세상에 보통 거짓말과 큰 거짓말이 있는데 통계야 말로 가장 큰 거짓말이라고 했다. 마크 트웨인의 경고를 제대로 들었다면 2008년에 빙산의 일각을 드러내어 지금까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금융위기, 재정 위기까지 겪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장부상의 숫자가 의미를 묻는 모든 질문을 사장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소통과 공감의 수사법, 그리고 여론조사는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지금의 20대는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에 태어난 콜호트이다. 1980년대 후반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졌고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의 승리, 다시 말해서 작은 국가, 탈규제, 감세, 민영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전 세계적인 추세로 자리 잡은 시기였다. 우리보다는 내가 우선이고 기호와 선택이 지배적인 담론이 되고 계량적인 수치가 의미를 대신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과 기호의 문제, 개인의 경쟁 능력만이 문제였던 자유 시장의 논리가 성년이 되면서 무너지고 있다. 이제는 일자리가 개인의 문제도 있지만 사회정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젊은이들이 정치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시장의 아이들 즉 소비자로만 존재했던 20대가 시민 또는 국민, 유권자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적 발언을 시작한 20대들에게 각 정당은 20대를 비례대표 후보로 또는 지역구 후보로 ‘ 생물학적’으로 초청하기 시작하였다. 20대가 맞닥뜨리고 있는 집단적 고민 즉, 안정된 일자리 창출, 성장 동력의 마련, 공동체의 복원이라는 어려운 과제에 대해서는 해법을 내지 못하는 대신 생물학적으로 20대를 앞세운다든지 20대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알아준다는 소통과 공감의 정치 또는 취업률 통계만 발표하고 있다.

소통과 공감의 정치는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문제의 본질을 돌리는데 주로 사용되었던 정치적 수사법이었다. 지금 20대에게 필요한 것은 기성 사회의 판에 끼어들어 구색을 맞춰주거나 소통과 공감의 정치에서 일시적인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다. 서세동점의 130여년의 역사 속에서 몰려오는 근대의 새로운 서구 문물에 적응이 빠른 것은 항상 신세대였다. 마치 이민 1세대가 영어 때문에 채 자라지도 않은 어린 자녀들에게 ‘통역’을 부탁하며 신문물에 적응해 가는 것과 비슷한 형국이었다. 그래서 신세대는 구세대의 길잡이가 된 것이다. 지금 20대에게 필요한 것은 실패한 국가 실패한 시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판을 짤 패기인 것이다. 왜냐하면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듯 지난 20년 동안 정말로 새로운 사회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사회에 대해 기성세대가 물려줄 나침반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