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협동조합] ICA Global Research Conference (2013.6.12-6.15) 참가 후기

Author
icooprekr
Date
2014-08-29 09:55
Views
2171
성공회대학교 일반대학원 협동조합경영학과 박사과정

최은주





뜨거운 햇볕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키 작은 관목들만 드문드문 서있는 황량한 벌판에 다소곳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공항에는 쉴새없이 비행기가 내려앉고 커다란 짐 가방을 수레에 가득 실은 사람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지중해에 떠있는 섬 사이프러스는 그렇게 수많은 유럽인들에게 좋은 휴양지로 사랑 받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17시간을 날아오느라 고단한 몸을 공항버스에 싣고 뜨거운 벌판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나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사이프러스(Republic of Cyprus)는 터키와 레바논으로 둘러싸인 지중해 동쪽에 있는 섬나라이다. 제주도의 3배 정도 되는 작은 섬이지만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로마, 비잔틴, 오토만, 영국 등 여러 나라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82년간의 영국 식민지배가 끝난 1960년에 드디어 독립국가를 세웠지만 14년 만에 또다시 터키가 섬의 북부지역 37%를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나라가 두 동강이 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 나라도 우리처럼 분단국가라는 사실에 가슴이 울컥하여 분단의 현장을 확인하러 갔으나 38선과 같은 무시무시한 장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작은 사무실에 앉아있는 유엔직원에게서 북사이프러스로 가는 것을 허락한다는 도장만 받으면 남북 간에 넘나드는 게 자유로웠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오고가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괜한 공포심에 사로잡혀 분단선을 넘는 모험을 감행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사이프러스의 명동인 듯 보이는 거리를 걷다 숙소로 돌아왔다.



ICA Global Research Conference가 열리는 장소인 EUC(European University Cyprus)는 수도인 니코시아에 있는 작은 대학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있는 사이프러스에서 열린 컨퍼런스는 “경제위기와 이후 협동조합의 역할(Cooperatives during Crisis and Post-Crisis)”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고 기조연설도 이에 대한 것이었다. 컨퍼런스 첫날 첫 번째 세션에서의 발표인지라 아침 일찍부터 두근거리는 마음을 지긋이 다독거리며 행사장에 들어섰다. 컨퍼런스 준비를 주관했던 EUC 교수 (Prof. Athanasios Hadjimanolis)의 인사말이 진행되는 동안 장내를 둘러보니 참석자는 모두 150명 정도로 생각보다 작은 규모였다. 한국 사람은 성공회대학교 협동조합경영학과의 장승권교수님과, ICA 본부에서 파견근무를 하고 있는 농협 직원 홍광석님이 전부였다. 이번 컨퍼런스에서는 이틀 동안 10개의 주제별로 나눠진 세션(협동조합 발전, 협동조합 은행, 협동조합과 경제, 협동조합 마케팅과 경영, 협동조합의 가치, 협동조합의 역사, 협동조합 경영과 지배구조, 협동조합법, 농협, 사회적기업가정신)에서 8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 Roser Spear

영국 Open University의 협동조합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컨퍼런스 둘째 날 ‘기업가정신과 협동조합’이라는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나는 협동조합 발전(Cooperative Development) 세션에서 첫 번째 발표자로 연단에 섰다. 기조연설이 있던 장소인지라 빨간 의자로 가득 찬 500명 이상 규모의 큰 강당에서 발표를 하게 되어 더욱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효과적인 이사회는 협동조합의 경영성과에 영향을 미치는가: iCOOP 사례연구”라는 제목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PPT를 보여주며 미리 준비한 발표문을 읽었다. 이후 좌장을 맡은 캐나다의 해몬드 교수(협동조합 간 협동을 통한 발전 사례)와 미국의 테일러 박사(협동조합의 성과 측정 위한 연구공동체 조직), 그리고 넴하드 교수(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제적 지속가능성에 협동조합이 미친 영향)의 발표가 이어졌다. 드디어 가장 긴장되는 질의응답시간이 시작되었다. 질문을 알아듣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어 제발 아무도 질문을 하지 말라고 주문을 외웠으나 손을 번쩍 든 두 번째 질문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의 주문이 효과가 없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캐나다 생메리대학교(Saint Mary’s University)의 소비경영대학(Sobey school of Business) 경제학 교수인 노코빅(Prof. Sonja Novkovic) 박사로 지배구조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이 대학은 뿌리 깊은 협동조합 운동 역사를 가진 노바스코샤지역에 있고 협동조합 관련 학과가 있어서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이 분의 질문을 받다니 참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하며 감격에 빠졌지만 질문을 받는 순간에는 이런저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질문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연구결과에서 경제적 성과가 조합의 재무성과 사이의 관계를 거꾸로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경제적 성과와 재무성과 사이에 음(-)의 영향 관계가 있다는 연구결과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의 아이쿱생협은 매장을 열 때 조합원의 출자와 차입으로 자금을 충당하는데 조합원의 차입금 규모로 경제적 성과를 측정했기 때문에 초기에 이자부담이 큰 것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 관계는 바뀔 것이라고, 한국말로는 이렇게 멋지게 설명할 수 있었을텐데, 영어는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미국의 테리 루이스(Terry Lewis)라는 분은 미국 협동조합의 자본조달방식에 대해 설명하면서 각각의 방식이 조합원의 참여와 성과라는 측면에서 장점을 가질 수 있다며 경제적 참여와 경영성과에 대한 측정 변수를 다양하게 할 필요성이 있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또한 영국의 린다 쇼(Prof. Linda Shaw) 교수님도 이에 대해 첨언을 하는 등 지배구조, 특히 조합원의 경제적 참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많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세션이 끝난 후 질문했던 분들을 찾아가 질문내용에 대해 더 자세히 묻고 답하기도 하고 조언을 듣기도 했다. 이후에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러 세션을 돌아다니며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발표를 들었다.



사이프러스의 노을은 참 아름다웠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오늘의 이 발표가 나 혼자만의 발표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채워준다. 논문이 만들어지기까지 인내심 있게 지도해주신 교수님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며, 귀찮은 설문조사에 협동이라는 이름으로 묵묵히 응답해주었던 수많은 지역 생협 이사 및 이사장, 재무성과를 보기 위한 자료를 보내주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던 지역 생협 직원들, 그리고 연구에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던 연합회 직원들. 이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협동조합 사례를 세계 여러 협동조합 연구자들에게 알리고 연구가 심화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발표 후 서너 명의 참가자들이 아이쿱 지역생협 이사회 활동이 조합원들의 참여를 높이고 재무성과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내용이 참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교과서 속에 든 한 줄의 글로만 알고 있던 ‘조합원의 민주적 참여’가 실제 현장에서 어떤 메커니즘으로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준 아이쿱 사례에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사이프러스 여행은 따뜻한 기운을 가득 품고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