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서의 사회적경제 : 존 스튜어트 밀과 아마르티아 센에게 배운다
김종걸(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원장)
사회적경제가 우리의 삶에 주는 의미를 생각했을 때, 우리는 영국의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저작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행복에는 저급한 쾌락과 고양된 행복이 있으며, 그 중 지고지선의 행복이란, 사회구성원 전체와 자신의 행복을 일치시킬 때의 기쁨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동일한 문제의식을 아마르티아 센(Amartya Kumar Sen, 1933~)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센은 인류 발전의 목적이 ‘실질적 자유’의 확대, 즉 각 개인이 누리는 ‘역량’(capability)의 확대에 있다고 말한다. 그 ‘역량’은 경제적 실무역량, 정치적 민주역량, 사회적 동감역량, 그리고 개인이 느끼는 삶의 기쁨과 도덕적 자부심까지 모두 포함한다.
사회적경제야 말로 개인의 행복과 공동체의 행복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통로다. 협동조합이던 사회적기업이던 그 활동의 주요 목적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그 일상의 참여가 개개인의 ‘삶의 활력’과 ‘지적·도덕적 능력의 향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전 세계 방방곡곡에는 사회적경제의 거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으며, 그런 노력에 의해서 보다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수많은 사회적경제 활동가 얼굴에서 발견되는 모습은 삶의 자부심이다. 밀이 말한 ‘공동체와 함께 하는 행복’, 센이 말한 ‘실질적 자유가 주는 삶의 자부심’이 이들의 얼굴에서는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사회적경제란 단순한 일자리창출과 복지효율화의 수단으로만 축소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통로이며,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상의 실천 장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의 활력과 자부심을 확대하는 중요한 거점인 것이다.
1. GDP의 세계를 넘어서
근대의 경제성장은 자연 제약으로부터 인류의 풍요로움을 확보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세상엔 여전히 빈곤이 넘쳐난다. 후진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뉴욕, 런던, 서울의 한가운데에도 가난과 불평등은 여전히 넘쳐난다.
GDP 성장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풍요는 근대경제성장이 가져오는 최대의 혜택이라고 많은 사람은 믿었다. 높은 생산능력 하에서 인간은 ‘노동’과 ‘굶주림’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두 가지 문제 때문이었다. 경제가 성장한다고 모두가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인간의 행복은 물질적 풍요만이 아니라 다양한 요소의 집합이라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경제성장이 사람들의 삶의 질과 행복에 항상 긍정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학자는 리처드 이스털린이었다. 그는 심리학 등의 분야에서 축적되어 온 각종의 사회 서베이를 활용하여 주관적 만족도와 소득 간의 관계를 분석했다. 그리고 한 나라 안에서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행복한 경향은 있으나 부자나라가 가난한 나라보다 더 행복하다는 법칙은 없다고 결론을 지었다. ‘이스털린 역설’이라고 불리는 것이다.1)
이제 많은 나라들은 국민행복을 기준으로 국가통계를 재정비해야 함을 천명하기 시작했다. 부탄같이 국민총행복(GNH)을 기준으로 국가정책의 목표와 내용을 재구성하는 나라도 생겨났다.2)
GDP 중심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가장 포괄적인 비판을 가한 것은 2010년에 발간된 「사르코지 위원회」 보고서였다. 이 위원회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던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아마르티아 센이 각각 위원장과 고문을 맡았고, 파리정치대학 교수이자 프랑스 경제연구소(OFCE)의 소장이었던 장 폴 피투시가 사무총장을 맡았다. 이 보고서의 서문을 쓴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말은 강력했다.
프랑스는 이 보고서의 결론을 모든 국제회의에서 주요 의제로 제기할 것이다. 새로운 글로벌 경제·사회·환경질서 구성과 관련한 회의와 논의의 장에 이 보고서의 논의결과를 가져갈 것이다. 프랑스는 모든 국제기구들이 이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그들의 통계시스템을 개선하도록 사력을 다할 것이다. 우선 유럽 국가들에게 그 권고를 따라 솔선수범할 것을 제안할 것이며, 당연히 프랑스가 먼저 통계체계를 개선할 것이다. 또한 국내 모든 공무원 교육기관의 커리큘럼으로 이 보고서를 채택할 것이다.3)
이 보고서에서는 사람의 행복이란 상당히 복합적인 것이며, 물질적 생활수준(소득, 소비, 재산) 이외에 고려할 사항이 많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12가지의 권고사항을 발표했다.
첫째, 생산보다는 소득과 소비에 주목해야 한다. 생산이 증가해도 소득은 감소할 수 있다. 감가상각, 국제적 소득의 흐름, 생산가격과 소비가격의 차이 등을 고려한다면 이런 상반된 결과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권고①). 소득과 소비는 가계의 입장에서 재정리해야 한다. 정부로 이전되는 세금,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 가계가 금융기관에 지불하는 이자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권고②).
둘째, 가계의 자산과 부채에 대한 포괄적인 계정을 만들어야 한다(권고③). 국가차원에서도 미래로 전달되는 모든 자산, 즉 천연자본, 인적자본, 사회자본, 물리적 자본 등을 포함하여 그 보존 상태나 증가상황을 동시에 알려주어야 한다(권고⑪). 이것이 가계와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다.
셋째, 비시장거래의 파악은 중요하다. 가계가 자체 소비를 위해 생산하는 서비스는 공식 소득이나 생산 지표에는 인정되지 않는다. 가계활동에 대한 포괄적 계정을 만들어 국민소득계정의 보조 축으로 사용해야 한다(권고⑤).
넷째, 행복파악에 대한 포괄적 접근이 필요하다. 행복에는 객관적 측면과 주관적 측면 모두 중요하다(권고⑥), 다양한 영역이 복합적으로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권고⑧). 통계청은 삶의 질에 대한 종합적 정보를 제공하고(권고⑨), 주관적 지표를 파악할 수 있는 설문들을 통계조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권고⑩).
다섯째, 불평등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소득, 소비, 재산 등에 있어서 ‘평균’ 보다는 ‘중위’ 지표를 중시해야 하며(권고④), 모든 지표에서의 불평등 상황을 포괄적 방식(사회·경제그룹, 성(性)과 세대의 조사)으로 평가해야 한다(권고⑦).
여섯째,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중시해야 한다. 기후변화 등 환경파괴와 관련된 엄선된 지표를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권고⑫).
2. 자유로서의 경제발전
이제 우리는 경제발전과 관련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경제발전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 과정에서 견지해야 할 기본원칙은 무엇인가?
아마티아르 센은 발전이란, 인간 삶에 필요한 요소(functionings), 즉 식량, 주거, 교육, 문화, 정치적 자유 등을 보다 높이 향유할 수 있는 자유(freedom)를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발전의 목적은 보다 높은 수준의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고, 이 선택의 폭과 범위를 넓히는 것이 바로 진보인 것이다. 이 자유의 확대를 위해서는 그는 다음의 다섯 가지가 보장되어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정치적 자유’다. 이것은 자유로운 정치적 표현, 검열 없는 언론의 자유, 정치인과 정당을 선정할 수 있는 권한 등 우리가 민주주의 혹은 시민권이라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경제적 용이성’이다. 경제적 자유와 같은 말이나 그는 ‘용이성’(facilitation)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자유로운 상행위의 권리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셋째는 ‘사회적 기회’다. 개개인이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사회가 교육, 보건 등의 관련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넷째는 ‘투명성’이다. 정보공개를 포함하여 투명성을 보장한다는 것은 부패, 재정적 무책임 등을 막는 이점을 가진다. 다섯째는 ‘인간의 안전보장’이다. 사회안전망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며, 실업급여나 빈곤층에 대한 소득보조와 같은 항시적(fixed) 정책만이 아니라, 기근구제나 비상 공공근로와 같은 임시(ad hoc) 비상조치를 모두 포함한다.
여기에서 주장하려는 것은 발전을 사람들이 향유하는 실질적 자유를 확장하는 과정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발전에 대한 협소한 관점과 대비된다. 그 관점은 발전을 GNP 성장이나 개인소득의 증대, 혹은 산업화, 기술적 진보, 사회의 근대화 등과 동일시한다..(중략)..하지만 자유란 다른 요소에도 의존하는 것이고, 여기에는 사회 경제적 제도(예를 들어 교육이나 보건체계)나 정치적·시민적 권리(예를 들어 공적 논의나 감사활동에 참가할 자유) 등이 포함된다..(중략)..만일 자유가 발전을 통해 촉진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특정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이 최상위 목표(자유)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중략)..발전을 위해서는 부자유의 주요한 원인들이 제거되어야 한다. 가난, 독제, 빈약한 경제적 기회, 구조적인 사회적 박탈, 공공시설의 방치, 억압적인 정부에 의한 과도한 간섭과 불관용이 바로 그것이다.4)
필자가 센에게 주목하는 것은 다음의 3가지다. 첫째, 그는 지극히 자유주의(개인주의)적 관점에서 발전의 논리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센의 모든 개념은 “개인에게 부여되는 의미”라는 차원에서 인식되어야만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실업, 빈곤과 같은 현상을 개개인이 가져야 할 역량(capability)의 박탈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실업은 단순히 소득의 결여가 아니다. 심리적 타격, 직업동기 및 기술과 자긍심의 손상, 건강악화와 질병(심지어 사망률의 증가), 가족관계와 사회적 삶의 붕괴, 사회적 배제의 심화, 인종적 긴장과 성적 불평등의 강화로 이어지는 좀 더 ‘총체적’인 현상인 것이다. 개개인의 삶을 중시하지 않는 한 나오지 않는 분석태도다.
이런 태도는 센이 기아(famine)를 설명할 때 사용했던 획득능력(entitlement)이라는 개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1943년 150만 명이 굶어죽었던 인도의 뱅갈(현 방글라데시)에서의 대기근을 면밀히 검토했던 센은 기근의 원인이 식량부족과 개개인의 소득부족이 아니었음을 발견한다. 식량은 충분했는데도 왜 기근이 발생했을까? 센이 주목했던 것은 쌀에 대한 접근능력(획득능력)이었다. 당시 쌀에 대한 투기, 영국총독부 정부의 무능 등이 일시적 쌀의 부족이 생겼으며, 이 때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은 쌀에 대한 획득능력이 작았던 어민, 운송노동자, 농업노동자, 수공업자 등이었다. 소농 및 소작인들은 영향이 적었다. 자가 생산의 쌀로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5)
그래서 개발경제학에서는 그의 이론을 역량접근법(capability approach)이라고 부른다. 이 때 역량이란 한 개인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즉 식량, 주거, 교육, 문화, 도덕적 자부심, 정치적 자유 등을 보다 높게 향유할 수 있는 실질적 자유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뿌리를 가진 기능(functionings)의 개념은 한 개인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을 반영한다. 이렇게 가치 있는 기능들은 적절한 영양공급이나 피할 수 있는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처럼 아주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고 자존감을 갖는 것과 같은 복잡한 활동이나 개인적인 상태까지 다양하다. 한 개인의 ‘역량’은 성취할 수 있는 기능들의 다양한 조합을 가리킨다. 따라서 역량은 일종의 자유로, 여러 가지 기능조합을 성취할 실질적 자유를 말한다(덜 형식적으로 말하자면 다양한 삶의 양식을 추구할 자유다).6)
둘째, 센은 ‘자유’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the primary end), 발전의 핵심적 수단(principle means of development)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한다.7) 예컨대 민주적 절차는 그 자체로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이것을 센은 다양한 언어로 표현한다. 자유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은 자유의 구성적(constitutive) 역할이며, 자유가 발전의 핵심수단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논리는 도구적(instrumental) 역할이라고 표현한다. 이 단어들을 연결시키면 센의 어법은 이렇다. 자유는 구성적 성격을 가지며, 그 자체의 확대가 인류의 진보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한편 자유는 도구적 성격을 가지며, 자유를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유가 필요하다.8)
어찌했던 센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원칙을 손상시키는 행위는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복지와 자유를 일종의 ‘사치품’으로 생각하고, 발전과정을 단지 “피와 땀, 눈물을 동반하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척 비판적이다. 자본축적을 위해 일시적 빈부격차를 확대시키는 것과 같은 정책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아무리 유능하다 할지라도 개발독제는 전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자유는 그 자체로서 언제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아마르티아 센은 한 국제회의의 기조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적이 있었다.
비민주적인 시스템이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훨씬 유리하다는 주장이 수시로 제기되곤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싱가포르의 지도자이자 초대 총리였던 리콴유가 주창했기 때문에 ‘리(Lee)가설’이라고 불립니다..(중략)..하지만 ‘리 가설’은 광범위하게 입수 가능한 모든 자료에 기초한 일반통계 검증보다는, 제한적으로 선택된 정보에서 도출된 단발적 경험주의에 기초한 것입니다..(중략)..실제로 권위주의 통치와 정치적 권리, 시민권리의 억압이 경제발전에 유익하다는 가설을 확인시켜주는 일반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중략)..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는 그 자체만으로도 본질적인 중요성을 가지며 이 사실은 결코 퇴색되지 않을 것입니다.9)
셋째, 그의 분석시점의 중심은 언제나 고통 받는 일반 민중이었다. 그는 81세에 쓴 그의 에세이집, 『장남들의 나라』 서문에서 자신의 학문과정이 추상적 논증(사회선택이론 등)과 다소 실질적인 문제들로 나뉜다고 말했다. 실질적 문제들란 바로 기근, 굶주림, 경제적 박탈, 계층·성·카스트별 불평등 등을 말한다.10)
그는 일부 성공한 산업 혹은 사람의 스토리를 통해서 발전을 선전하지 않았다. 그 사회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함께 논리를 구성시켰다. 경제학자라면 당연히 가져야 태도다. 그의 눈에 인도는 항상 뛰어난 일부 엘리트(장남들)만 칭송하는 나라였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인도인들이 서양의 학계, 경영계, 문학계, 의료계, 엔지니어링, 과학·기술 연구부문에서 뛰어난 업적이 전해질 때 마다, 인도는 이것을 ‘국가의 승리’로 축하하고, 심지어는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가난한 민중들(막내들)도 인도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남자의 4분의 1과 여자의 반이 문맹인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일은, “지독히 부당할 뿐만 아니라 전반적 사회제도로서 아주 비효율”이기도 하다고 그는 개탄했다.11) 이러한 접근은 『자유로서의 발전』에 실려 있는 그의 어린 시절의 원형체험에도 잘 나타나 있다. 경제적 부자유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이야기다.
10살 무렵, 나는 지금은 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에 있는 우리 집 정원에서 놀고 있었다. 그 때 피를 철철 흘리는 한 남자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등에 칼을 맞은 상태였다. 당시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열되기 전이었는데,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서로 죽이는 지역적 소요가 있었다. 그 남자는 일용노동자인 이슬람교도로 적은 일당을 받고 우리 이웃집에 일하러 왔다. 그리고 힌두교도 지역인 이곳에서 동네 불량배들에게 길에서 칼을 맞은 것이었다..(중략)..그는 자기 아내가 이런 때에는 적대적인 동네에 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했다. 하지만 집에 먹을 게 없기 때문에 적은 돈이라도 벌기 위해 일해야만 했다. 그의 경제적 부자유는 결국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의 죽음으로 귀결되고 말았다..(중략)..사회적·정치적 부자유가 경제적 부자유를 길러낼 수 있는 것처럼, 경제적 부자유도 사회적 부자유를 키울 수 있다.12)
오랫동안 경제발전의 논리는 단순한 GDP 증가의 신화에 빠져있었다. 또한 자유의 억압에 눈을 감는 논리 또한 횡횡했다. 1960-70년대 개발독제 시대의 대한민국이 그랬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위해 있다. 그리고 사람은 단순히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자유, 도덕적 자긍심, 지적 충만함 등 다양한 기능(functionings)의 집합을 원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유로서의 경제발전이 가지는 의미다.
3. 공적 참여가 사람에게 주는 영향
그렇다면 인간에게 사회적 참여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이것을 생각했을 때 필자는 영국의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의 저작들을 떠 올리곤 한다. 밀은 먼저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원칙이 사회현상의 올바른 평가기준이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스승이었던 벤담과는 달리 행복에는 저급한 쾌락과 고양된 행복이 있으며, 그 중 가장 지고지선의 행복은 인류 내지 사회구성원 전체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과 일치시킬 때의 기쁨으로 생각했다.13)
어떤 사람이 외형적인 조건은 상당히 괜찮은데도 자신의 삶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그에 따라 삶 자체가 그다지 풍요롭지 않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만 알지 다른 사람들을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공적이던 사적이던 애정을 쏟을 일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삶을 흥분시킬만한 것이 훨씬 적다. 그리고 일체의 이기적 욕심에 종지부를 찍고야마는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면서 그나마 있던 흥분상태의 가치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몸은 죽더라도 개인적으로 애정을 쏟던 일을 남겨둔 사람, 특히 그 일과 더불어 인류 전체의 공영(共榮)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을 길러온 사람은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도 청춘의 활력과 건강은 물론, 인생에 대한 생생한 의욕도 유지할 수 있다.14)
죽음 앞에서도 인생에 대한 생생한 의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은 평범한 우리들이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경지다. 그럼에도 공공의 이익과 개인의 삶을 일치시켜 나가는 과정에서의 즐거움과 활력은 잘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공동체에 대한 봉사’ 혹은 ‘공적인 관여’는 인간의 지적·도덕적 능력을 향상시켜, 인간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밀은 그의 『대의정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회가 되어서 상당한 수준의 공적 의무를 수행한다면, 그 사람은 곧 양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다. 법정(dicastery)과 시민총회(ecclesia) 참여를 통해 아테네 일반 시민들의 지적 수준이 놀랄 정도로 높아졌다. 고대사회 특유의 사회적·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행 덕분에 아테네는 고대와 현대 그 어느 곳보다도 더 큰 발전을 이룩한 것이다..(중략)..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시민 개개인이 드물게라도 공공 기능에 참여하면 도덕적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생긴다는 사실이다..(중략)..결국 자신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면서 사회전체의 이익이 곧 자기 자신의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품는다..(중략)..공공의 영역이 완전히 소멸된 곳에서는 개인의 사적 도덕도 황폐해 지고 만다..(중략)…따라서 어떤 참여라도, 하다못해 공공기능에 대한 극히 미미한 수준의 참여라도 유용하다.15)
밀이 『대의정부론』에서 말한 ‘공적인 일’이란 정부(혹은 법원)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큰 규모의 공동체에서 모든 구성원이 직접 참여하기 어렵기 때문에 “완전한 정부의 이상적인 형태는 대의제(representative)”라고 말한다.
그는 민주주의의 우수함을 논의하면서, “유권자들이 자신의 정부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그저 돈에 눈이 어두워 표를 팔아버리는” 곳, “정부가 직접 공격을 받는데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는” 곳, “특정 개인에 대한 광적인 숭배심에서 그 사람 발 앞에 자유를 헌납하고 자유정부를 좌초시킬 권한을 갖다 바치는 곳”에서는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16)
그러한 면에서 밀에게 있어서 ‘자유’란 2가지 속성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자유로운 비판정신이다. 밀은 『자유론』에서 자유에는 ①생각과 표현의 자유(비판과 토론의 자유 포함), ②개인적 행동의 자유, ③집단적 행동의 자유(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있으며, 행동은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므로 이 중에서도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기본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자유의 속성은 바로 참여에 있다. 공적 참여를 통해 인간의 도덕적 능력, 실무적 능력이 더욱 확대되어 가는 것이다.17)
4. 사회적경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필자는 사회적경제야 말로 개인의 행복과 공동체의 행복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통로라고 생각한다. 협동조합이던 사회적기업이던 그 활동의 주요 목적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그 일상의 참여가 개개인의 ‘삶의 활력’과 ‘지적·도덕적 능력의 향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경제는 그것이 경제활동인 점에서 경제적 부와 일자리를 만든다. 또한 조직 내 혹은 타 조직과의 민주적 협력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민주시민의 훈련장소로도 적합하다. 그 외에도 약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적 박탈을 해결해 간다.
필자가 방문했던 여러 사회적경제 거점은 이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다. 필리핀 마닐라의 빈민가에서는 협동조합 생수공장을 만들고, 아이들의 방과후 학교를 운영하는 단단한 활동가가 살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시골 땅 끝 마을에서는 노인 밖에 안 남은 마을에서 공동의 취사와 운동시설을 만들어 운영하는 걸쭉한 청년이 있었다. 서울역 맞은편 동자동 쪽방촌에는 사랑방공제조합을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청년 활동가가 있었다.
이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회적경제 활동가 얼굴에서 발견되는 모습은 삶의 자부심이었다. 밀이 말한 ‘공동체와 함께 하는 행복’, 센이 말한 ‘실질적 자유가 주는 삶의 자부심’이 이들의 얼굴에서는 빛나고 있었다.
그러한 면에서 사회적경제란 단순한 일자리창출과 복지효율화의 수단으로만 축소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통로이며,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상의 실천 장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의 활력과 자부심을 확대하는 중요한 거점이다. 즉 사회적경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바라기는 2020년 이후에는 한국의 경제정책 전체도 새롭게 정비되었으면 한다. 시장은 보다 경쟁적이며 활기차게 변해야 하며, 정부는 국민을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시장과 정부의 개혁은 그 자체로만 완결되지 않는다. 시장실패와 정부실패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민사회의 기획을 구상해야만 시장과 정부의 능력도 업그레이드된다. 해법은 지역에서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조직하고, 이들이 가능한 많은 역할(의료, 복지, 교육 등)을 하는 것이다. 기존의 시장과 정치·관료체계의 외곽에 건강한 시민사회의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고, 이들에게 더 많은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당장은 사회적경제 조직으로서의 경쟁력을 높이고, 시민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의 접촉면을 넓히며, 사회적경제 조직 간에 서로 협력하고 공유하는 강한 연대조직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가능할 정도로 수많은 선배들의 활동경험과 묵묵히 헌신하는 지역의 활동가가 우리에게는 존재한다. 새로운 세대의 사회적경제에 대한 관심 또한 뜨겁다. 중요한 것은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 특유의 낙관론과 자부심이 사회적경제를 이끌어가는 기본 동력이기 때문이다.
1) ‘이스털린 역설’(Easterlin Paradox)에 대해서는 김균, 「행복경제학과 복지」(이근식 외, 『한국형 복지국가』, 철학과 현실사, 2014년) 참조.
2) 부탄은 1970년대부터 GNH(gross national happiness)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명시적으로 부탄정부 정책에 반영된 것은 2008년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에 따른 헌법제정에서 유래한다. 헌법에 “GNH를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국왕직속의 국민총행복위원회를 설립하고, 5년 단위의 발전전략을 짜고 이를 실행한다. 자세히는 박진도, 『부탄 행복의 비밀』(한울아카데미, 2017년) 참조.
3) 사르코지위원회 보고서(Mismeasuring our lives: why GDP doesn’t add up by Joseph Stiglitz, Amartya Sen, Jean-Paul Fitoussi, 박형준 옮김, 『GDP는 틀렸다』, 동녘출판, 2011년). 본고에서의 내용은 번역본을 기본으로 하되, 상당부분을 영어원문으로 수정한 것이다.
4)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Development As Freedom(김원기 옮김, 『자유로서의 발전』, 갈라파고스, 2013년)의 41-42쪽.
5) 자세히 아마르티아 센, Poverty and Famines(?崎卓, 『貧困と飢餓』, 岩波書店, 2000년)의 제6장 참조.
6) 전게의 『자유로서의 발전』, 133쪽.
7) 발전과정에서 자유의 평가적 이유(evaluative reason), 효율적 이유(effectiveness reason)의 중요성 등의 표현도 위의 ‘구성적’, ‘도구적’이라는 단어와 연계된다. 전게의 센의 『자유로서의 발전』 중 서장과 제2장의 논의 참조.
8) 센의 개념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자유(freedom), 역량(capability), 획득권한(entitlement)과 같은 개념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각종의 다른 번역어가 혼란을 가중시킨다. 영어의 ‘capability’라는 단어는 ‘잠재능력’이라는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사용하며, ‘entitlement’는 그냥 ‘인타이틀먼트’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본고에서는 역량, 획득권한 등으로 번역한다.
9) 아마르티아 센, “Democracy as a Universal Value”(A Key note address in New Delhi on “Building a Worldwide Movement for Democracy”(원용찬 옮김, 『센코노믹스』, 갈라파고스, 2008년의 139쪽) 참조.
10) 아마르티아 센, Country of First Boys(정미나 옮김, 『세상은 여전히 불평등하다』, 21세기북스, 2018년)의 25-26쪽.
11) 전게의 센의 『세상은 여전히 불평등하다』, 184-203쪽 참조.
12) 전게의 센의 『자유로서의 발전』, 46-47쪽.
13) 밀의 스승인 벤담은 푸시핀 놀이(Pushpin)나 러시아 시인 푸슈킨(Pushkin)이나 개인의 주관적 상황과 가치선호에 따라 선택될 뿐 그 둘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밀은 개인의 주관적 판단과 관계없이 가치 사이에는 객관적으로 우열이 매겨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편이 나으며,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주장한다(라이언, 『정치사상사』, 남경태·이광일 옮김, 문학동네, 937쪽). 그리고 이것은 “웬만한 상식과 경험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 선택을 할 것으로 믿었다(서병훈 번역, 『자유론』, 해제, 238-9쪽).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관련사실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얻은 후 오랜 시간 숙고하면 대체적으로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인간이성에 대한 믿음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서병훈 번역, 『공리주의』, 해제, 141쪽).
14)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책세상, 서병훈 번역, 2007년), 36쪽.
15) 존 스튜어트 밀, 『대의정부론』(서병훈 번역, 아카넷, 2012년), 72-74쪽.
16) 전계의 밀의 『대의정부론』, 14-15쪽.
17)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서병훈 번역, 책세상, 2005년)의 제2장, 3장 참조. 밀은 인간은 누구나 고유의 개별적 가치(개별성)를 가지며, 각자의 장점이 잘 발휘되어 가는 삶을 좋은 삶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이에 입각한 ‘참여’가 인간을 더욱 더 완성시켜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