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회적경제를 좋아하는가?
김종걸(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원장)
이 글을 쓰는 이유
이 글이 상정하는 독자는 나의 젊은 동지들이다. 그 중에는 대학에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도 있고, 여러 장소에서 만난 젊은 활동가들도 있다. 그 대부분은 사회적경제 관련자(사회적기업가, 협동조합활동가, 중간지원상근자, 관련 공공기관, 기업 사회공헌담당자)이며, 사회적경제가 지향하는 세계, 즉 자본보다는 사람이 중시되고, 사람과 자연이 함께 공생하는 그런 세상을 꿈꾸며 살고 있다.
이들은 젊은이 특유의 결기로 미래 희망에 들뜨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의 어려움에 좌절하기도 한다. 사람에 대한 드높은 기대가 실망으로 추락하며, 미래생활의 불안감에 떨기도 한다.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지역청년센터, 복지관, 쪽방지원센터 등 각각 일하는 곳은 달라도, 활동 현장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무늬만 ‘사회적’인 일부 사회적기업의 행태에 대해 분노한다. 한국사회에서 시민의 자원봉사와 기부라는 사회적경제의 중요한 자원이 고갈되어 있음에 절망하며, 자원을 쥐고 흔드는 관료들의 과도한 서류요구에 치를 떨기도 한다. 사회적경제에 대한 정부 지원이 오히려 생태계 전체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우려하며, 정부지원에 이끌려 몰려든 수많은 자칭 사회적기업가, 도시재생활동가, 마을활동가 중에서 ‘천사’와 ‘악마’를 구분하는 어려움을 토로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이들에게 과감히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회적경제는 ‘실체’이며, 그 시대적 ‘의미’도 무척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해 가는 삶의 보람과 자부심을 강조하고 싶었다. 전 세계 방방곡곡에 사회적경제의 거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으며, 그런 노력에 의해서 보다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는 특유의 낙관성과 자부심을 우리는 많이 확인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지난 10여년 ‘사회적경제’를 화두로 많은 일들을 해 왔다. 사회적기업육성종합대책(2011), 협동조합기본법(2012), 사회적경제기본법(2015년 이후) 등 관련 정책과 법률의 제정과정에 꽤 깊이 관여했다. 국내외 많은 사회적경제 현장을 다녀보았으며, 늦은 밤까지 현장 활동가들과 시간을 함께 하려 노력했다. 재직하고 있는 한양대학교에는 국제학대학원 내에 사회적경제 전공의 석사 및 박사과정을 개설했으며, 학부에서도 사회혁신 전공과정을 만들었다. 매주 목요일 사회적경제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곳(미래혁신학교)도 꾸준히 운영해 왔다. 왜 이러한 일들을 하였는가? 대체 무엇을 기대하며 그렇게 달려왔던가?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도달한 결론은 결국 하나였다. 사회적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법과 제도와 정책이 아니라, 사람중심의 조직을 만들려는, 길고 긴 일상의 노력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사회를 안정시키고, 복지전달체계를 효율화시키는 등의 정책효과만을 생각했었다. 그 때문에 관련된 법을 만들고 정책을 정비하면 사회적경제가 발전할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체계로 보고 정책이라는 인풋(input)과 그 효과라는 아웃풋(output)만을 생각했었다. 당연히 사회적경제 현장의 수고와 노력, 좌절과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알량한 먹물근성으로 섣불리 지도하려 했다.
사람중심의 경제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악전고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일례로 아무리 작은 협동조합이라도 시장경제 속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경영능력이 필요하다. 협동조합의 7원칙(자발적이고 개방적인 조합원제도, 조합원의 민주적 통제, 조합원의 경제적 참가, 자율과 독립, 교육/훈련 및 정보제공, 협동조합들 사이의 협동, 커뮤니티 관여)을 준수하고, 이것을 잘 실현시켜 갈 민주적 리더십 또한 필수적이다. 장애인들의 고용을 책임지는 사회적기업 또한 사람에 대한 속 깊은 애정이 없는 한 계속 유지되기 어렵다. 이 어려운 것을 우리는 왜 해야 하는가?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다. 그 과정이 우리들 삶의 보람과 자부심,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점이다.
2. 사회적경제의 개념과 효과
그러면 사회적경제란 무엇인가? 사실 이 단어는 대부분에게는 익숙하지 않고 손에도 잡히지 않는다. 각국의 보고서 혹은 법령규정에서도 내용이 추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1994년의 EC위원회에서는 사회적경제조직은 “경제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조직되고, 참가의 원칙(1인 1표 원칙)과 연대의 원칙(구성원 간의 연대, 조직 간의 연대,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연대)에 입각해서 운영된다.”고 말한다. 구체적인 조직 특징으로 ① 자본보다 인간을, ② 훈련과 교육에 의한 인간 발달, ③ 자유의지에 의한 결합, ④ 민주적 운영, ⑤ 자율과 시민 참여 등을 중시한다.(주1).
유럽의 대표법인 스페인의 ‘사회적경제법(de Economia Social)’(2011년3월29일)에서도 사회적경제에 대해 규정하는 것은 커다란 과제였던 것 같다. 제3장 취지문에서 “이 법의 기본 목적은…사회적 경제의 정의(定義)를 통해 더 나은 법적 안정성을 제공”하는데 있다고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기본원칙을 제시한다(제4조). ① 자본보다 인간 및 사회적 목표를 우선시한다. ② 경제활동으로 얻은 결과는 주로 남녀 조합원 혹은 단체 고유의 사회적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③ 단체의 내부적 연대는 물론 지역 발전, 남녀의 기회 평등, 사회적 결속, 사회적 배제에 처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의 통합, 안정적인 양질의 고용 창출, 개인 및 가족의 삶과 노동의 조화, 그리고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사회와의 연대를 촉진한다. ④ 공공기관에 대해 독립성을 유지한다.(주2).
한국의 관련법도 추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적경제기본법(윤호중법안)에서는 사회적경제를 “구성원의 공동 이익과 사회적 가치의 실현을 위하여 사회적경제 조직이 호혜 협력과 사회 연대를 바탕으로 사업체를 통해 수행하는 모든 경제적 활동”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운영원칙으로서, ① 사회적 가치 추구, ② 자율/독립/투명한 운영, ③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 및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 ④ 이익의 사용과 배분은 구성원 전체의 공동 이익과 사회적 목적의 실현을 위해 우선 사용, ⑤ 조직 간의 상호 협력이 유지되어야 함을 천명한다.
옳은 말이기는 하나 손 안에 잘 잡히는 단어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체적인 조직형태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을 통칭하는 언어들도 나라마다 서로 다르다. 가령 사회적경제를 협동조합, 공제조직, 결사체(association) 등으로 인지하고 사용하는 경우는 프랑스와 스페인이며,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영국에서는 사회적경제라는 단어가 비영리섹터, 자발적 섹터, 사회적기업 등과 혼용되어 사용된다. 사회적경제라는 단어가 별로 통용되지 않는 국가들은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네덜란드 등 주로 게르만국가들이며 이들 국가들에서도 비영리조직, 자발적조직, 비정부조직 등의 단어가 더욱 일반적이다.(주3).
일반적으로 ‘사회적경제조직’이라고 일컬을 때 사람들은 다음의 2가지 구성요소를 머리에 떠올린다.
첫째는 그 조직이 사회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조직이라는 점이다. 사실 모든 합법적 상품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사용가치) 중 화폐와 교환 가능한 것(교환가치)을 생산한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을 생산한다는 차원에서는 굳이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일반 경제조직과 사회적경제조직과는 차이가 나는 것은 그 활동의 주요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적기업이란 사회목적을 실현하는 기업으로서 기업의 이익이 주주 및 소유주들에게 귀속되기보다는 사업의 고유목적 혹은 지역공동체에 재투자되는 기업”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성격을 잘 나타낸다.(주4).협동조합 또한 일반기업과는 완연히 다르다. 이윤이 목적이 아니라 조합원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문제를 풀기위한 자발적인 인적 조직이다. 이와 같이 경제활동의 목적이 ‘이윤추구’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문제해결 혹은 조합원들의 문제해결에 있는 것인지에 따라 사회적경제조직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사회적경제를 구성하는 둘째 요소는 조직의 운영원칙이 사람중심의 민주적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나라마다 상법상 차이는 있으나 기업의 지배자는 자본소유자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회적경제조직은 사회적 소유(비영리법인), 공동소유(협동조합), 사회적 통제(이해관계자의 영향력) 등 민주적 소유 및 지배구조가 강조된다.
사회문제(혹은 조합원문제) 해결, 그리고 민주적 거버넌스라는 2가지 축에서 본다면 사회적경제를 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2가지를 모두 갖추어야 사회적경제 조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2가지 조건을 엄격하게 모두 갖추기는 어렵다. 민주적 거버넌스가 작동되더라도 법률적으로는 주식회사 형태를 가진 사회적기업도 많다. ‘사회문제’라는 것도 이해하는 바에 따라서는 상당이 넓은 범위를 가진다. 그래서 세상에는 엇비슷하나 조금은 뉘앙스가 다른 여러 단어들이 사용된다. 사회적경제, 사회적기업, 임팩트비지니스, 소셜벤처, 커뮤니티 비즈니스 등 표현방식은 다양하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문제해결과 민주적 거버넌스라는 2가지의 요소를 ‘가장 엄격한’ 형태로 적용시키려는 단어는 ‘사회적경제’라는 표현일 것이다.
둘러보면 한국에서도 새로운 사회적경제의 실험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많다. 그리고 각각의 사회적경제 단위들은 동일업종의 일반 영리기업보다 고용, 복지, 서비스의 질 차원에서 우수하다는 사례는 많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사회적기업 늘푸른돌봄센터(현 사회적협동조합 도우누리)는 재가요양보호, 산후도우미, 노인돌봄, 장애인활동보조 등 다양한 돌봄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하며, 현재는 서울시립 중랑노인전문요양원도 위탁관리(2013년 9월) 하고 있다(2014년 1월 현재 직원수는 돌봄서비스 138명, 요양원 102명). 돌봄서비스의 경우 일자리의 질도 동일업종 전국 최고 수준이다. 정규직이 아니더라도 무기계약 형태로 장기근속을 유도하고 있고, 근속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고 있으며, 파트타임 근로자에게도 고용보험이나 산재보험을 가입하여 주고 있다. 당연히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것은 기본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늘푸른돌봄센터는 돌봄서비스 영역의 고질적인 문제인 높은 이직률(연간 30-40% 대)을 7-8% 대의 낮은 수준으로 유지했다.(주5).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협동조합은 전 세계에서 매년 2.2조 달러의 매출을 실현한다. 미국에서만 3만 개의 협동조합이 20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낸다. 프랑스에서도 2만 1000개의 협동조합이 1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국제협동조합연맹 통계). 스페인의 빌바오(Bilbao), 이탈리아의 트렌티노(Trentino), 캐나다의 퀘벡(Qu?bec) 등 협동조합이 잘 발전한 곳은 모두 높은 수준의 소득과 복지를 향유한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글로벌 금융위기의 한가운데에 있던 2009년, 국제연합(UN)은 총회에서 2012년을 ‘세계 협동조합의 해’로 지정하고 이를 기념하기로 했던 것이다.(주6).
사회적기업의 경우에 있어서도 애초부터 이윤극대화를 단일원리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적 기업활동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특히 비영리원칙(배당제한)에 입각하며 사회적 목적을 실현한다는 기업활동은 영업수익 이외에 사회의 자발적인 선의의 자원들과 결합하기 쉽게 한다. 기업, 종교, 학교, 일반시민의 기부와 자원봉사, 윤리적 소비와 투자는 사회적기업 생태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연구(Global Impact Investing Network)에 의하면 현재 전 세계적으로 총 1,340개 기관에서 약 5,020억달러(약 600조원)가 사회적기업 등에 투자되는 자산으로 운영되고 있다.(주7). 규모가 이러하니 전 세계 사회적기업가는 그 자금을 받기 위해 자신을 능력을 증명하려 노력한다. 하버드(Harvard), 스탠퍼드(Stanford), 옥스퍼드(Oxford) 등 세계 유수의 경영대학원에서도 우수한 사회적기업가를 키우는 별도의 교육과정을 개설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3. 너무나 오래된 당연한 주제
그러나 생각해보면 한국사회에서 사회적경제라는 주제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오래된 주제이며, 인간사회 속에서 당연히 존재했던 가치였다.
우리는 그 동안 수많은 활동가들에 의해 한국의 사회적경제가 탄생되고 유지되어 왔음을 잘 알고 있다. 지학순 주교님과 장일순 선생님의 노력으로 현재 원주의 사회적경제 기반이 만들어졌다. 그분들이 만든 원주신협 운동, 원주소비자협동조합(현 한살림) 운동의 전통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승되어 지금 원주의 사회적경제운동을 이끌고 있다.
이찬갑, 주옥로, 홍순명 세 선생님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홍성군 홍동면의 풀무학교 주변은 누가 봐도 자랑스러운 사회적경제 운동의 산물이다. 나는 홍동마을의 ‘밝맑도서관’에 갈 때 마다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마을입구에 자리 잡은 멋진 도서관은 ‘정부지원’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한 땀 한 땀의 ‘노력’이 만들어온 결과다. 지금도 소규모지만 주민들을 위한 많은 교양강좌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이쿱생협연합회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이들은 1997년 설립된 이후로 2017년 12월 현재 95개의 회원조합 및 조합원 26만 2,507명(매출액 5,538억 원)이 참여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소비자생활협동조합으로 성장했다. 2018년에는 기존의 울타리를 SAPENet(Sustainable Society and People-centered Economy Network)이라 바꾸고 아이쿱생협, 농업생산협동조합인 파머스쿱, 구례, 괴산자연드림파크의 입주기업협의회, 관련 사회적경제기업 및 비영리 조직이 연합된 협력 네트워크로 발전하고 있다.
서울역 맞은편 동자동 쪽방촌에는 사랑방공제조합이라는 치열한 사회적경제 현장도 존재한다. 쪽방 주민 412명이 2억 3,000만 원을 출자하고, 대출 이자 2%로 생활 자금을 변통하는 공제협동조합을 운영한다. 대출 상환금은 90%에 육박하며, 만약에 못 갚더라도 크게 질책하지 않는다. 서로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기초생계보장 대상자이며 월수입이 방값 포함 70~80만 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들이 만들어놓은 기적이다. 이들은 매달 5,000원, 1만 원씩 출자금을 지불하면서, 1인당 평균 55만 9,000원의 출자금을 적립했다.
한국의 사회적경제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외국의 사례를 보고 벤치마킹해서 얻어진 것도 아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사회적경제비서관실을 만들고, 기획재정부에 사회적경제과를 만들어서 창출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문제를 풀기 위해 묵묵히 땀을 흘려왔던 수많은 선배 활동가들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노력들이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나라를 좀 더 풍요롭게 만드는데 밑거름이 되어왔다. 자랑스러운 전통이다.
4. 협력하는 종(種)으로서의 인간
사실 사회적경제를 위한 노력은 ‘사회적’ 존재인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존재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게는 가족과 친구의 관계망 속에서 살며, 크게는 지구 반대편 생면부지의 사람에게까지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관계를 의식적으로 유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법률이나 조약과 같은 사회계약의 형태로 발전시킨 것은 생명체 중 인간이 유일하다.(주8).
장황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의 삶 속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과 국가가 아니라 개인, 가족, 사회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영역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가족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으며 가격 또한 형성되지도 않는다. 먼 곳에 있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 기부를 하거나 자원봉사를 하는 것 또한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개인의 일상 삶에 너무 많이 개입하는 것은 자유주의 국가, 민주주의 국가의 작동 원리와는 차이가 나며, 그런 면에서 국가 또한 우리의 일상 삶 속에서는 생각보다는 먼 존재다.
우리 일상 생활에서 작동되는 원리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등가성(等價性)’의 원칙도, 국가에 대한 ‘의무’의 원칙도 아닌, 보다 이타적이며 호혜적인 ‘사회적’ 관계다. 『거대한 전환』을 쓴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사회의 통제를 받지 않는 시장이 ‘악마의 맷돌’처럼 인간본성에 내재한 사회성 혹은 공동체성을 해체하고 파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시장의 파괴력이 강력하다고 해도 이타성과 호혜적 관계의 가족과 사회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래서 사회를 파괴해가는 형태의 시장은 계속 유지될 수 없으며, 결국은 사회(공동체)의 반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주9). 2011년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령운동과 영국의 청년 폭동은 시장의 폭주에 대한 공동체의 자기방어를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 열풍이 부는 이유도 근본은 마찬가지다. 시장의 폭주, 이것을 옹호하는 권력에 대한 공동체의 반격인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를 위한 인간의 이타성은 무한정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의 이타적 행동이 사회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확신, 사회 전체의 행복이 결국은 나의 행복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이타적 행동은 확대된다. 일종의 호혜성의 원칙인 것이다.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분석했던 퍼트넘(Robert Putnam)은 그의 유명한 저서, 『나 홀로 볼링』에서 호혜성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호혜성의 체계 내에서 각 개인의 행동은 단기적 이타주의와 장기적 자기이익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결합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나는 언젠가 당신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막연하고 불확실하며 계산적이지 않은) 기대감에서 당신을 돕는다. 호혜성은 단기적으로는 이타적인 일련의 행동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 행동들이 모두 합쳐지면 모든 참여자를 더 좋아지게 만든다.”(주10).
이러한 호혜적 행동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는 톨스토이의 우화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외상값을 받으러 갔던 가난한 구두 수선공 세묜이 한 젊은이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였던 그 젊은이는 한겨울 벌거벗은 채로 성당 옆에 쓰러져 있었다. 세묜의 부인은 받아오라는 돈은 못 받아오고, 술은 얼굴이 벌겋도록 마시고, 게다가 덤으로 객식구까지 데려온 남편에게 무서운 독설을 퍼붓는다. 그러다 이내 따뜻한 스프와 거친 빵을 내놓기 위해 부엌으로 향한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살피는 마음(이기심)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남을 위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주11).
그러나 젊은이가 만약 착실한 일꾼이 아니었다면 부인의 호의는 한 번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들의 관계가 지속적 신뢰 관계로 발전한 이유는 ① 만남(network)이, ② 세묜 부부의 따뜻함과 젊은이의 성실함이라는 규범(norm)을 통해, ③ 결국은 서로 신뢰하는 사회자본(social capital)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퍼트넘도 같은 저서에서 네트워크와 규범이라는 차원에서 미국의 사회자본의 형성과 위기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정치 참여, 사회단체 활동, 종교적 참여, 직장에서의 연계, 일상생활에서의 사회적 연계, 이타심, 자원봉사, 자선심, 정직함, 신뢰, 사회운동 등 다양한 차원에서 미국의 사회자본이 감소하고 있음을 분석한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우리의 과제를 설정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사회자본을 확충하여 호혜적 관계의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해결 실마리의 첫째는 다양한 참여를 통해 사람들의 관계망을 확충하는 것이다. 둘째는 참여 과정에서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는 규범을 참여자가 내면화하는 것이다.
5. 사회적 참여의 연결 통로: 사회적경제
인간에게 사회적 참여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사회적경제란 단순한 돈을 벌기위한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경제행위라고 한다면, 가치 있는 행위가 인간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사회적경제 운동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했을 때 영국의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1806-1873) 저작들 속의 경구들을 떠 올리곤 한다. 밀은 먼저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원칙이 사회현상의 올바른 평가기준이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스승이었던 벤담과는 달리 행복에는 저급한 쾌락과 고양된 행복이 있으며, 그 중 가장 지고지선의 행복은 인류 내지 사회구성원 전체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과 일치시킬 때의 기쁨으로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외형적인 조건은 상당히 괜찮은데도 자신의 삶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그에 따라 삶 자체가 그다지 풍요롭지 않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만 알지 다른 사람들을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공적이던 사적이던 애정을 쏟을 일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삶을 흥분시킬만한 것이 훨씬 적다. 그리고 일체의 이기적 욕심에 종지부를 찍고야마는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면서 그나마 있던 흥분상태의 가치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몸은 죽더라도 개인적으로 애정을 쏟던 일을 남겨둔 사람, 특히 그 일과 더불어 인류 전체의 공영(共榮)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을 길러온 사람은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도 청춘의 활력과 건강은 물론, 인생에 대한 생생한 의욕도 유지할 수 있다.”(주12).
죽음 앞에서도 인생에 대한 생생한 의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은 평범한 우리들이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경지다. 그럼에도 공공의 이익과 개인의 삶을 일치시켜 나가는 과정에서의 즐거움과 활력은 잘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공동체에 대한 봉사’ 혹은 ‘공적인 관여’는 인간의 지적/도덕적 능력을 향상시켜, 인간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계기를 만들어준다.(주13). 밀의 그의 『대의정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회가 되어서 상당한 수준의 공적 의무를 수행한다면, 그 사람은 곧 양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다. 법정(dicastery)과 시민총회(ecclesia) 참여를 통해 아테네 일반 시민들의 지적 수준이 놀랄 정도로 높아졌다. 고대사회 특유의 사회적/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행 덕분에 아테네는 고대와 현대 그 어느 곳보다도 더 큰 발전을 이룩한 것이다..(중략)..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시민 개개인이 드물게라도 공공 기능에 참여하면 도덕적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생긴다는 사실이다..(중략)..결국 자신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면서 사회전체의 이익이 곧 자기 자신의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품는다..(중략)..공공의 영역이 완전히 소멸된 곳에서는 개인의 사적 도덕도 황폐해 지고 만다..(중략)…따라서 어떤 참여라도, 하다못해 공공기능에 대한 극히 미미한 수준의 참여라도 유용하다.”(주14).
밀이 『대의정부론』에서 말한 ‘공적인 일’이란 정부(혹은 법원)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큰 규모의 공동체에서 모든 구성원이 직접 참여하기 어렵기 때문에 “완전한 정부의 이상적인 형태는 대의제(representative)”라고 말한다. 필자는 사회적경제야 말로 확대된 공공의 영역, 즉 공동체의 영역에 참여를 독려하는 중요한 연결통로라고 생각한다. 협동조합이던 사회적기업이던 그 활동의 주요 목적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그 일상의 참여가 밀이 말한 의미에서의, ‘삶의 활력’과 ‘지적/도덕적 능력’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은 일반적으로 기업들이 하고 있는 단순한 사회 공헌 활동을 넘어 협동조합의 이념을 지역사회에서 확대시키려 노력한다. 1980년 국제협동조합연맹 모스코바 대회에 제출된 보고서에서 레이들로(A.F.Laidlaw) 박사는 협동조합 지역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었다. “(개별)협동조합 단독으로는 주류 경제 시스템과 사회질서에 실질 변화를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주15). 비슷한 의미로 성남용인 한살림의 윤형근 상무는 한양대에서 열린 세미나(2015년 10월 30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생활은 의식주, 상하수도, 전기/에너지, 폐기물 처리, 보건의료, 교육 ·문화 등 생활의 대부분을 시장과 행정기관에 위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들에게 맡기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생협에서) 먹거리의 문제를 교육/교통/복지/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지역에서의 삶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맞는 말이다. 둘러보면 한국 사회에서 협동조합의 지역운동은 다양하게 전개된다. 아이쿱소비자활동연합회는 지역 활동가 지원, 생협시민학교, 식생활교육센터, 재능기부 활동, 윤리적소비운동, 한국사회적경제씨앗재단 등 여러 방식으로 지역사회와 관련을 맺는다. 수원아이쿱생협의 민바우 모임에서는 마을에서의 위험한 전기줄 등 불편 사항을 점검하고 민원을 제기한다. 진주아이쿱생협은 시 예산을 분석하고 의정감시 활동을 한다. 홍성, 안산, 안성, 완주, 전주, 서울 성북, 강동, 노원, 양천 등 거의 모든 지역에서 지역의 활동가들은 보다 좋은 사회 만들기에 매진한다. 협동조합 유전자가 만들어놓은 다양한 ‘공적’ 참여 활동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2,500년 전 공자님도 마찬가지였다. 『논어』의 첫 구절에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이 기록되어 있다.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즐거움, 같은 뜻을 품은 동지가 멀리서 찾아와 서로 격려해주는 즐거움,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꿋꿋이 그 신념을 지켜나가는 자부심, 이것은 우리의 사회적경제 선배들이 걸어왔던 길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사회문제 해결을 ‘결과’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를 통해 자발적 공동체를 경험해보는 것이다. 서로 협력하며 사회문제를 해결할 때 느끼는 삶의 충족감, 그 즐거움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당사자 의식과 그 역량의 성장을 서로 돕는 생태계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안전망이다. 조그마한 실천이 언젠가는 사회 전체의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낙관성과 설령 그 사회가 변하지 않을지라도 화내지 않고 꿋꿋이 이어가는 활동가의 씩씩함,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어려움을 참아내는 사회적경제 활동가들의 즐거움의 근원일 것이다. 오랜 시간 내가 간과했던 것은, 사회적경제 정책의 밑바탕에 깔린 이 ‘가치체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부심’만으로 끝날 일은 아니다. 사회적경제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변혁의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의 작은 실천이 결국은 사회 전체의 변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경제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을 중시하는 협력과 연대의 실천이 사회적경제조직의 시장 경쟁력의 기반임을 인식해야 하며(①기업으로서의 사회적경제),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시민행동의 거점으로도 삼아가야 한다(②운동으로서의 사회적경제).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소속된 모든 구성원이 민주주의자로서의 기본 소양을 잘 닦아 결국은 정치의 세계를 변화시켜 가야 한다(③정치로서의 사회적경제).
나는 젊은 사회적경제 활동가가 미래 한국의 중앙과 지방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뷰캐넌(James Buchanan, 198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 법칙에 빗대어 정치에서의 그레샴 법칙을 말한 적이 있다. 개인적 욕심이 많은 정치인은 더욱 맹렬히 권력 쟁취에 힘을 쏟으며, 그래서 더 좋은 정치인을 몰아낸다는 것이다. 정치 시장을 바꿔야만 하며, 그러기 위해서도 좋은 정치인을 공급해야 한다. 올바른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권력의 기반으로서의 권위(도덕적 능력과 실무적 능력)를 준비하는 긴 학습과 실천 과정이 필요하다.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이해, 타인에 대한 관용, 토론에 의한 합의, 미래에 대한 확신, 소수자에 대한 배려 등 민주주의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 잘 훈련되어야만 한다. 이 또한 사회적경제조직의 역할이다. 사회적경제조직은 민주주의 실천의 최고의 학교이기 때문이다.(주16).
(주1) “EC에서의 협동조합, 공제 조직, 결사체, 재단을 위한 3개년 계획(1994~1996)”, 자세히는 宮?賢治 ? 川口?史, 『福祉社?と非?利/協同セクタ?: ヨ?ロッパの挑?と日本の課題』(1999년, 日本評論社)의 제1장 참조.
(주2) 스페인 사회적 경제법(2011년 3월 29일).
(주3) European Economic and Social Committee, The Social Economy in the European Union, 2012. 29쪽.
(주4) 이것은 사회적기업을 중시했던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부시기(Tony Blair, 1997.5-2007.6), 담당부처였던 영국통산성(DTI)에서 내렸던 사회적기업에 대한 대표적인 정의다. Department of Trade and Industry, U.K., Social Enterprise: A Strategy for Success, 2002.
(주5) 2012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이 발효된 이후에는 사회적협동조합 도우누리(2013년 4월 1일, 보건복지부 인가 1호)로 전환하게 된다. 사회적협동조합 도우누리의 성장과정은 한국 사회적경제 영역의 성장과정의 귀감을 보여준다. 2001년 서울 광진구를 중심으로 광진주민연대라는 시민단체가 설립되고, 2008년에는 지역의 고용문제를 해결하는 자활공동체(늘푸른돌봄센터)가 설립된다. 2010년에는 고용노동부의 사회적기업으로 인증받고 협동조합기본법 이후에는 사회적협동조합(2013년)으로서의 조직의 안정성을 확보했다. 시민조직이 자활사업, 사회적기업, 사회적협동조합으로 변환되며 지역의 고용문제 해결의 담당자로 커 나갔던 것이다.
(주6) 유엔의 2009년 136호 결의문(Resolution 64/136, Cooperatives in social development).
(주7) 전체 규모 중 압도적으로 미국과 캐나다가 58%, 서유럽이 21%에서 운영된다. 앞으로 투자가들이 투자에 있어서의 사회적, 환경적 고려를 더함으로서 임팩트투자의 규모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이 연구에서는 결론을 맺는다. 현재 전문투자기관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는 펀드 중 1/4 정도, 즉 13,000억달러는 앞으로 임팩트 투자로 운영될 것으로 예측한다. Global Impact Investing Network, Annual Impact Investor Survey, 2009. https://thegiin.org/research참조.
(주8)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란 남녀가 결합된 가정(oikos), 여러 가정으로 구성된 마을(k?m?), 그리고 여러부락으로 구성된 복합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간은 그 복합체를 구성하는 동물(z?ion politikon)이라고 규정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정치적 동물 혹은 사회적 동물로 번역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천병희 옮김, 2009, 숲 출판사), 제2장.
(주9) 칼 폴라니에 대한 간단하지만 명쾌한 해설은 김균, 「칼 폴라니와 자유주의 비판」(이근식/황경식 편,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삼성경제연구소, 2001) 참조.
(주10) 로버트 퍼트넘, 『나홀로 볼링』.(정승현 옮김, 페이퍼로드, 2009년), 218쪽. 퍼트넘은 사회자본을 개인들 사이의 연계(connection),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호혜성과 신뢰의 규범이라고 규정한다. 같은 책, 17쪽.
(주11) 레프 톨스토이(1885).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순영 옮김(2015), 문예출판사.
(주12)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책세상, 서병훈 번역, 2007년), 36쪽.
(주13) 밀의 스승인 벤담은 푸시핀 놀이(Pushpin)이나 러시아 시인 푸슈킨(Pushkin)이나 개인의 주관적 상황과 가치선호에 따라 선택될 뿐 그 둘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밀은 개인의 주관적 판단과 관계없이 가치 사이에는 객관적으로 우열이 매겨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편이 나으며,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주장하는 것이다(라이언, 『정치사상사』, 남경태/이광일 옮김, 문학동네, 937쪽). 그리고 이것은 “웬만한 상식과 경험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 선택을 할 것으로 믿었다(서병훈 번역, 『자유론』, 해제, 238-9쪽).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관련사실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얻은 후 오랜 시간 숙고하면 대체적으로 바람직한 것을 얻을 것이라는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서병훈 번역, 『공리주의』, 해제, 141쪽).
(주14) 존 스튜어트 밀, 『대의정부론』(서병훈 번역, 아카넷, 2012년), 72-74쪽.
(주15) A. F. 레이들로(1980). 『21세기의 협동조합』. 염찬희 옮김(2015), 알마출판.
(주16) 이 논리에 대해서는 김종걸, 「기업/운동/정치로서의 협동조합」(『생협평론』 2015년 겨울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