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경제발전④ 한국형 제3의 길: 시장과 국가를 넘어서

김종걸 한양대 글로벌사회적경제학과 교수

대한민국이 위기인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3저(저성장, 저일자리, 저출산)와 3불(소득과 자산의 불평등, 기회의 불평등, 지역발전의 불균형)의 시대라는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 과거의 산업화모델, 그리고 기존의 국가와 시장의 이분법적 사고로는 이 위기를 돌파하지 못한다는 것도 이미 상식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경제정책 속에 민주주의적 원리를 전면 도입해야 하며 상부상조의 따뜻한 사회를 복원해야 한다.

필자는 민주주의자란 민중에게 주어진 더 큰 권력에 의해서 더 활기차고 더 행복한 나라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민주주의에 의해서 따뜻한 사회를 실현하려는 시민들의 의지가 더욱 더 잘 조직될 수 있다고 믿는다.

민주적 경제운영의 첫 번째 원리는 ‘참여와 공정’이다. 참여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생산요소가 정치적 참여만이 아니라 경제적 참여를 통해 스스로의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공정함은 참여를 이끌어내는 기반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히 만드는 것에서부터 한 사회의 공정함은 달성된다. 격차를 그대로 놔 둔 채 벌이는 경쟁이 아니라(소위 fair competition), 약자의 능력을 끌어올려 기회의 평등을 만들어 가는 것이 공정함(equity)인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하는 일자리정책 및 사회적경제 활성화 정책은 많은 사람들의 경제적 참여를 늘리는 중요한 정책적 기반이다. 최저임금인상과 같은 정책도 공정함을 유지하는 필수정책이다. 소위 소득주도성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문재인 경제정책은 공정함과 참여를 어떻게 잘 실현시킬 수 있는가에 결국 성공여부가 달려있을 것이다. 참여(일자리)를 통해 공정함을 실현하며, 역으로 공정함의 유지를 통해 일자리의 지속가능성을 확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사고할 때 경제학의 원조 애덤 스미스의 논의는 유효하다. 그는 단순히 자유시장경제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국부론’ 제1편 제1장의 제목이 ‘분업’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노동생산성 향상의 중요한 원인이며,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제4편에서 전개되는 중상주의에 대한 집요한 비판도 국내 산업기반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무역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단순히 애덤 스미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5대양 7대륙을 주름잡던 산업강국 영국인들의 기본인식이었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인 영국의 대니얼 디포는 그의 저서 ‘영국경제의 구상’(1728년)에서 네덜란드에 대비되는 영국 경제의 강점이 바로 활발한 국내 시장에 있으며, 그것이 자연스럽게 흘러넘쳐 수출로 연결되는 경제구조에 있다고 강조했다. 국부의 원천은 ‘황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있으며, 일부 특권적인 상인자본의 축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경제적 참여도 확대에 있는 것이다.

민주적 경제운영의 두 번째 원리는 ‘연계와 협력’이다. 다양한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는 구도, 이것이 21세기형 혁신의 근간이다. 우리는 그것을 소위 ‘생태계’라고 부른다. 벤처생태계, 사회혁신생태계, 정책생태계 등 다양한 생태계를 논의하는 이유는 그 시스템의 성과가 참여와 네트워킹, 그리고 협력을 통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재벌기업 중심의 폐쇄적인 산업조직의 형태로는 이러한 다양한 산업생태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독점적 행위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천명한 문재인 경제정책이 이 측면에서는 흔들림 없이 계속 유지되기 바란다. 과거의 민주정부, 김대중, 노무현 양 정부에서도 재벌개혁은 정권 초반기에만 작동되었던 구호였다. 시간이 지나며 개혁의 의지는 사라졌으며, 결국 재벌공화국은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개혁해 나가길 기원한다.

민주적 경제운영의 세 번째 원리는 ‘혁신과 책임’이다. ‘혁신’을 통해 우리사회의 가능성을 최대로 끌어올리며, 국민 삶을 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것을 ‘책임’지는 정부와 시민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도덕적 권위와 실무적 유능함을 겸비한 정부,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현하는 시민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혁신의 개념이다. 혁신은 단순한 경제혁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혁신은 경제, 사회, 정부 등 다양한 영역으로의 확산되어야 한다.

경제혁신은 다양한 벤처기업의 창출로 가능해 진다. 혁신적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지원강화, 국가 R&D 사업에 대한 전면재편 등 할 것은 많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마을기업, 골목상권,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등 다양한 영역으로 혁신이 확산되어 가야 한다. 그래야만 5000만 인구의 안정된 먹거리와 일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

사회도 혁신되어야 한다. 핵심은 사회의 자기복원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정부의존형 사회에서 상부상조의 자립형 사회로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하고 소비하는 단순한 호모에코노미쿠스가 아니다. 때로는 무상노동의 자원봉사자이며 좋은 일에 대한 기부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양한 시민참여를 잘 조직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투명성 확대를 위한 시민공익위원회 설치(영국의 Charity Commission), 사회적경제 관련 정책의 통합적 관리를 위한 사회적경제기본법, 시민사회 및 사회적경제 전체정책의 미래전략을 수립하고 조율하며 지원하는 담당주체의 확정(시민사회청: 한국판 Office of Civil Society) 등은 모두 다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들인 것이다.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방분권이다. 참여를 통한 혁신이 벌어지는 공간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중앙의 행정 및 재정권한은 지방으로 대폭 이양되어야만 한다. 중앙·지방의 권한과 사무를 잠정적으로는 50:50 정도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방의 발전계획을 현재의 광역단위에서 기초단위로 내리는 것도 방안이다. 경제활동의 주체이며, 복지의 수혜자인 지방주민 스스로가 경제 및 복지행정에서의 자기결정권을 확대시키도록 (가칭)지방발전법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지역차원에서 새로운 혁신의 기반이 될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지방분권의 장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지방분권은 거대한 관료국가 대한민국을 뿌리부터 바꾸게 한다. 경제와 복지정책의 구상 및 실행권한의 상당 정도가 기초 혹은 광역지자체로 넘어간다면 그리고 정책의 결정 및 실행과정에서 시민참여가 상당히 실현된다면 대한민국의 관료체계는 거대하게 전환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시대적 과제는 새로운 정책을 만드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일정한 원칙에 따라서 정책을 통폐합 시키고 효율화시키는 것에 있다. 정책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다. 그 최대의 비법은 정책의 수요자가 정책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지방분권의 최대 의미인 것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좌파 우파 상관없이 당연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것이 세련된 좌파, 우파의 세계적인 추세다. 정부와 시장이라는 2분법 구조로는 더 이상 문제를 풀어갈 수 없다. 21세기 형 좌파와 우파는 단순히 국가와 시장만을 논의하지 않는다. 시민의 자발적 참여의 힘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심각히 고민한다. 영국 노동당 토니블레어의 ‘제3의 길’과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의 ‘big society’ 정책은 그런 면에서 고민의 지점이 같다. 오히려 혁신, 분권, 참여, 시민 등의 단어는 ‘우파’에서 더 많이 사용한다. 좌파의 관성은 국가의 역할을 더욱 강조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기적이면서도 또한 상당히 이타적이다. 이기적인 욕망을 잘 조직하는 것이 시장에서의 활력을 유지하는 것이며 이타적인 따뜻한 마음을 잘 조직하는 것이 무너진 사회를 제대로 복원하는 길이다. “거대한 전환”을 쓴 칼 폴라니는 자기조정적인 시장이 인간본성에 내재한 사회성 혹은 공동체성을 해체하고 파괴하는 “악마의 맷돌”이며, 바로 그 해체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다. 시장기구란 인간사회와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며, 인간 삶을 유지시키는 사회의 안전을 맷돌로 갈아버리는 시장이란 계속 유지될 수 없으며, 결국은 필연적으로 사회(공동체)의 반격을 받게 됨을 강조한다. 시장기구 속에서 작동되는 인간의 이기심은 공동체를 유지시키려는 따뜻한 마음(호혜적 이타성)에 의해서 제어 받게 되는 것이다.

이기심의 정당성을 설파했던 아담 스미스조차도 인간 본성에 가지고 있는 이타적 심성에 대해 충분히 강조한다.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연민(pity)과 동정심(compassion)이 이런 종류의 천성에 속한다.” 아담 스미스가 상정했던 인간의 삶이란 시장에서의 인간의 이기심만이 작동되는 세상이 아니었다. 인간은 윤리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이기심은 이타심에 의해서 보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는 이타심이 무한정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등가성의 원칙이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 나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일종의 호혜성의 원칙인 것이다. 자원봉사자가 많은 나라, 기부가 일상화되어 있는 나라는 이러한 호혜성의 원칙이 잘 작동되는 나라다. 협동조합이 잘 발전되어 있는 나라도 그렇다. 1인=1표의 민주주의 원칙을 고수한다는 것은 부담(출자금)과 권한(지배력)의 등가적인 교환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장기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신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인간 간의 신뢰란 너무나 연약한 자본이기 때문이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인간에 대한 믿음과 배려가 사라진 곳에서는 많은 사람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조직, 즉 가족 및 친구관계로 스스로의 연결망을 축소시킨다. 이러한 곳에서 사회적경제는 발전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설정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따뜻한 심성이 작동되는 사회의 총량을 늘릴 수 있을까. 해결의 실마리는 과감한 권력의 하방에 있다. 시민들이 중앙 및 지역사회의 각종 문제를 풀어가는 주체로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자 밀(J.S.Mill)도 그의 『대의정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통 사람들이 공공문제를 다루는데 서툴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일단 공적인 영역에 들어와 일을 취급하게 되면 그들의 생각이 깊어지고 정신 또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똑같은 일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류계층 사람도 공공문제에 관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커지고 안목도 높아진다.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고 들으며 그 자신의 지식도 넓어진다.” 엘리트들은 언제나 시민의 가능성을 폄하하려 노력한다. 그들 권력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바꾸어야 한다. 시민의 가능성을 믿고 그들에게 권력을 과감히 이양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민주주의에 의해서 이타적 호혜성을 실현하는 시민들의 의지가 잘 조직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필자가 오늘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시민사회, 그리고 그 경제적 표현으로서의 사회적경제는 무척 중요하다. 시장과 국가의 실패가 너무나 명확한 곳에서는 그 필요성이 점점 더 커진다. 그리고 사회적경제는 ‘사회’를 먹고 산다. 사회의 총량을 늘리기 위한 시민의 참여확대, 그것을 위한 한국판 OCS(office of civil society) 및 CC(charity commission)의 설립, 사회적경제기본법의 제정 등은 따뜻한 사회를 잘 만들어가는 초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