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경제발전③ 따뜻한 사회와 민주주의의 가치

 

 

김종걸 한양대 글로벌사회적경제학과 교수

1. ‘아시아적 가치’의 다의성(多義性)

한 때 아시아적 가치 담론이 상당히 유행한 적이 있었다. 특히 IMF 경제위기 이후에는 아시아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과거 긴 시간 동안 벌어졌던 아시아적 가치와 관련된 각종 담론들이 쏟아 나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은 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대항논리로서 공동체성이 존재하는 아시아의 미덕을 강조하는 것,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1960년대 이후 아시아의 급격한 경제발전을 아시아적 특수성 속에서 발견하려던 움직임, 이후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이 아시아적 가치에 그 원인이 있다는 논의에 이르기까지 똑 같은 단어가 전혀 다른 입장과 설명방식에 의해서 논의되어 왔다, ‘아시아적’이라는 수식어가 붇는 담론체계는 시기별, 국가별, 그리고 그러한 담론을 생산해 내는 주체의 문제의식에 따라 다양하게 분포되어 온 것이다.
한 시기 아시아적 공동체를 형성하자며 침략전쟁을 진행시켜 갔던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구상도 그 기반에는 서구와는 구별되는 아시아적 가치체계의 우위성, 특수성이 강조되었으며(大川周明 등), 이에 대한 반발로서 전통적인 아시아적 공동체 논의를 진행시켜 가며 호혜평등의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움직임(한국의 안중근 또는 중국의 孫文 등이 이 부류에 해당될 것이나) 또한 아시아적 가치체계에 대해 강조점을 두고 있다(주1). 침략의 이데올로기로서도 또한 침략에 대한 저항 이데올로기로서도 아시아적 가치는 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아시아의 경제발전을 생각하는데 있어서도 동일하다. 1980년대까지 급속한 경제적 성공을 기반으로 하여 아시아적 가치는 이 지역의 경제성장에 있어 중요한 동력이라고 분석되었던 것에서부터 1997년 경제위기 이후에는 아시아적 가치는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와 연고주의, 비효율적 정부 등을 초래하는 아시아적 정체를 나타나내는 원인으로 지목받게 된다. 잘 되어도 ‘아시아적 가치’ 때문이며, 못 되어도 ‘아시아적 가치’ 때문인 것이다.
사실 ‘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일본의 사상가이자 미술사가인 오까쿠라 텐신(岡倉天心 1902)은 한중일, 동남아, 인도까지 포함시키는 지역을 염두에 두며, 아시아는 하나다고 말하고 있다. “아시아는 하나다. 히말라야 산맥은 두 개의 강대한 문명, 즉 공자의 공동사회주의를 가진 중국문명과 베다의 개인주의를 가진 인도문명으로 나누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두 문명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 눈 덮인 장벽마저도 ‘궁극과 보편’을 추구하는 사랑의 저 큰 확대를 단 한 순간도 가로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서구적 관점에서 본다며 아시아란 페르시아와 그 동쪽 지방 전체를 다루는 것이며 이러한 아시아는 종교적 차원에서 본다면 유교, 불교, 도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가치체계의 종합이다. 아시아는 지리적으로 너무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으며, 이렇게 광대한 지역을 하나로 묶는 통합적인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시아적 가치라는 개념의 배후에는 ‘서구’와 대립되는 타자(他者)로서의 ‘아시아’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또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ide)의 표현에 의하면, 서구에 의해 창출된, 하나의 이미지, 담론체계인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 불과한 것이다(주2).

2. 유교적 가치와 경제 및 정부성과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시아적 가치체계는 유교적 가치체계로 한정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면 설명의 초점은 주로 동아시아(한국, 중국, 대만, 일본)가 될 수밖에 없다. 인도의 힌두교, 그리고 중동의 이슬람적 세계관과 동아시아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만 보더라도 한중일은 가치관 체계에서 서로 다르며, 또한 이 지역의 종교구조도 유교, 불교, 도교, 신도 등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분포 속에서도 유교를 동아시아의 공통분모로 하는 이유는, 도교 및 불교에 비해 유교가 현세적 운영원리(권력의 운영원리, 인간관계의 운영원리)에 적합하다는 점 때문이다. 동아시아에 있어서 유교의 역할은 ‘종교’ 체제라기보다는 경세학(經世學)과 도덕률(道德律)로서의 역할이 강하며, 따라서 현실 속의 권력의 양상, 개인과 집단과의 관계 등을 설명하는 공통분모로 될 수 있다.
동아시아의 경제성장과 유교와의 관련성을 주장한 학자는 많다. 하버드 대학의 에스라 포겔(Ezra F. Vogel, 제5장) 교수는 대만, 한국. 홍콩, 싱가포르의 4마리 용(four little dragons)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배경에는 이들의 경제성장을 규정하는 상황적 요인만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전통적 요인들도 크게 작용했다고 말한다(주3). 현대에 있어서 산업화를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경제주체간의 긴밀한 협력과 팀워크, 과학, 공학, 경영기술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 그리고 세계시장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처럼 복잡한 조직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 국가들에게 자리 잡고 있는 전통적 사고방식이 근대적으로 변형됨으로서 가능한 것으로 포겔은 보고 있다. 그 중요한 요소로는 ①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의 실력에 입각한 철저한 엘리트주의가 높은 도덕률을 가지고 일을 추진해 나가는 관료집단을 형성시켜 나간 것, ②각 사회에서의 엘리트 선발은 기본적으로 시험의 원칙에 입각하였으며(고시, 입학시험 등), 이로 인해 그 사회에서 가장 능력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지배세력으로 될 수 있었다는 점, ③사회적 엘리트들은 적절한 수입을 보장해 주면 개인적인 부의 축적을 자제하며 전체적으로 공공목적을 위해 헌신하였다는 점, ④개개인은 국가, 회사 등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강한 귀속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귀속감,충성심이 집단의 좋은 경제적 성과를 가져왔다는 점, ⑤특히 이러한 집단에 대한 충성은 중앙집권적인 조정 과정이 중요한 후발 개도국의 경제성장과정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는 점, ⑥이들 국가에 있어서 열악한 복지체제는 가족공동체가 그들 구성원들의 복지에 실질적인 책임을 지는 문화적 전통에 의해서 보완 가능했다는 점 등이 강조된다.
이러한 변형된 유교(new confucianism)의 순기능에 대해서는 포겔만이 아니라 서양에서의 아시아적 가치의 주요한 이론가들(Herman Kahn, Peter Berger 등)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며, 1980년대 이후 대만과 중국에서 벌어진 신유가(新儒家) 담론의 양산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한편 한국 내에서도 이러한 유교의 경제적 ‘긍정론’에 적극적 논진을 펴 왔던 학자는 김일곤 교수이다. 김일곤(1997a, 1997b, 1999)은 유교의 핵심으로서 다음의 네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첫째는 일군만인(一君萬人)의 중앙집권체계이다. 유교는 원래 치자(治者)의 사상이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집단조직의 안정을 생각한다. 이 일군만민의 정치체제는 군주를 정점으로 하여 그 아래 문무백관이라는 지배조직이 있고 피지배자인 백성이 있다는 조직 원리에 의해 성립되고 있다. 둘째는 충효일치(忠孝一致)의 인간관계로서 군주, 또한 부모에 대한 복종은 유교적 사회조직의 질서원리를 이룬다. 셋째는 농본주의(農本主義)적 경제관을 가진다. 유교에서 말하는 사농공상은 하나의 분업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서열을 나타낸다. 넷째는 평화주의(平和主義)의 경향과 교육의 중시이다. 평화주의라는 것은 보수적이며 체제유지의 강화와 연계되어 있다. 여기서 교육은 대단히 중요하며 지배계층의 교육과 민중의 교화에 의해 체제가 유지되고 평화에 힘쓴다.
이러한 전통 유교적 가치체계는 그대로 경제성장에 친화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상공업에 대한 천시, 형식적 도덕주의와 실용적 정신의 부재, 개인의 경제적 성취에 대한 멸시 등은 자본주의적 공업화에 적합하지는 않았다는 점은 신유교적 가치관을 강조하는 논자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보인다. 논지는 이러한 전통적 가치관이 서양의 충격에 직면하면서 새롭게 탈바꿈해 나간 것에 있다. 일군만민, 충효일치, 평화주의적 성향은 정부의 강한 리더십을 용인하였으며, 조직에 대한 강한 충성으로 나타났다. 또한 농본주의는 근대적 경제성장에 적합하도록 상공업의 진흥으로 변화한다. 교육에 대한 강조는 근대공업사회에 필요한 인적자원에 대한 강조와 육성으로 귀결 된다.
한편 동아시아의 관료의 우수성도 그들의 유교적 가치에 기반을 것으로 판단하는 논자도 많다. 소위 동아시아 국가의 성격을 개발지향국가(developmental state)로 특징 짖고 있는 서양학자들, 특히 차머스 존슨(Chalmers Johnson, 1975, 1982)과 같은 학자들은 이들 국가들에 있어서 우수한 관료제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아시아적 가치와 관련하여 활발한 담론을 형성시켰던 함재봉(1999)은 동아시아의 발전에 있어서의 개입적인 정부가 시장주의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에 있어서 순기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교의 위민사상(爲民思想)에 기반 한 정부의 강력한 책임의식, 관료-지식인의 철저한 민본주의가 국민과 기업인들의 민족주의와 결합한 결과라고 보며, 특히 위민사상과 민본주의에 입각한 유교정치철학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인식을 배태시킴으로써 서구의 자유주의 세계관에서와는 달리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용인하는 동아시아 특유의 정치문화를 창출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유교적 가치체계 속에서 새로운 문명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고 칭송하는 논자 또한 많다. 미조구찌 유조(溝口雄三, 1991)는 자본주의 발전과 유교의 관련양상 보다는 유교윤리가 자본주의의 도덕성을 재확립하는데 유용하다는 가치의 관점에서 21세기 자본주의는 세계규모의 전체적 조화를 생각해야 하며, 아시아의 원리나 가치관의 재발견을 통해 도덕을 확립함으로써 자연과 인류의 조화, 인류 간 도덕적 공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일곤(1999)도 현존하는 자본주의를 유럽식 복지자본주의, 미국식 경쟁자본주의 그리고 아시아의 공생자본주의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 공생자본주의의 특징은 가족집단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기업 또한 가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김일곤 교수는 그 어느 쪽이 더욱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도, 오늘날의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 즉 물질만능주의, 발전지상주의, 시장지상주의의 연장선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천연자원의 고갈, 생태계의 파괴, 경쟁의 압박에 의한 열등자의 양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집단 내에서의 사랑의 동기에 의한 공생자본주의의 이념이 더욱 확대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주4).

3. 따뜻한 사회와 민주주의

이상과 같은 논리들이 지면을 채우고 있었을 때 필자가 곤혹스럽게 생각했던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아시아적 가치론 속에는 어딘지 천년을 이어온 어딘지 변화하지 않는 문화가 유리의 생활을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경제에 있어서 문화(가치체계)가 가지는 의미는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형이상학적으로 절대화시키면 곤란하다. 문화도 변화하며,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경제와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해 나가기 마련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문화는 새로운 자양분을 수혈 받아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해 나가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전통을 불변하는 고정적 실체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아시아적 가치라는 개념은 정치,경제적 토대를 무시한 채 모든 것을 문화로 환원시켜 버리는 환원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문화를 영속적인 실체로 간주하려는 형이상화의 오류마저 범하고 있다”라는 이승환 교수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상당히 더디게 변화하며, 문화적 공동체 소속원의 유전자 속에 자리 잡고 있어 형질변경을 하기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탈 냉전시기에 접어들어 세계의 주도권 다툼은 결국 각 문명 간의 문화충돌에 의해 추동될 것으로 보고 서구의 기독교 문명은 아시아의 이슬람문명과 유교문명에 의한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수호하기 위해 단결(?) 해야 함을 역설한 바 있다. 문화를 기본으로 하여 현실정치세계의 대립점을 그려 나가며 문명(문화) 간의 충돌을 대비하려는 그의 시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현실 세계의 대립의 근저에는 경제적 이해관계, 정치,군사,안보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문명차원의 대립점이 있다는 그의 인식에는 동감한다. 문화는 대립점의 전체는 아니지만, 그것이 정치, 경제, 군사,안보적 대립이 생겼을 경우 문화의 차이에 의해서 현실의 대립은 더욱 증폭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문화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현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이것은 상당 기간 장시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경우 과거의 문화, 그리고 현재의 문화 속에서 더디게 변화하면서도 장래의 사회변화에 중요한 자양분이 될 수 있는 가치체계를 발견하는 일은 중요하다.
둘째로 소위 ‘유교적 가치’의 견강부회(牽强附會)적 해석도 우리가 경계해야 한다. 충효일치(忠孝一致)의 복종적 질서원리가 국가, 기업의 억압적 기제로 사용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러한 면에서 기존의 한국의 경제발전과정은 유교적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반해 왔다는 점을 강조한 이승환(1999a, 1999b)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도의와 원칙을 앞세우기는커녕, 천박한 공리주의와 원칙 없는 타협으로 정실과 부패를 남발한 한국의 천민자본주의는 “올바름을 바르게 지키고,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正其宣不謀其利)는 유교정신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유교정신은 무위(無爲)정치이지 통제정치가 아니기 때문에 권위주의적 강한 정부 역시 유교의 특징으로 보기에는 어렵다. 유교사회의 선비들은 엄격한 윤리원칙에 따라 벼슬길에 나아가고 재야에 머무는 일(出處)을 분명히 했지만 군사독제 시절의 관료 엘리트들은 부도덕한 정권에 빌붙어 권세와 이익을 탐하고 부패와 횡령을 자행했던 사람이 태반이었다. 한국사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재벌들의 족벌경영, 군대동기간의 권력세습, 극단적인 집단 이기주의, 폐쇄적인 유사가족주의, 도구적 연고주의는 유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반유교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주리종(義主利從) 혹은 견리사의(見利思義)와 같은 유교의 도덕적 원칙에 의해 지도받는 경제체제를 진정한 ‘유교적 자본주의’로 개념화하면서 이러한 유교적 자본주의의 실현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셋째로 앞으로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체계는 자유주의의 기본원리에 ‘사회성’ 혹은 ‘공동체성’을 결합시켜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성, 공동체성을 우리의 전통가치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아주 좋은 일이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유지하는 것은 자유주의적 개혁의 가장 근본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실패’와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것은 한 사회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다. 그렇다면 사회 전체의 ‘공공’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자유주의에서의 ‘자유’의 개념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보지 않을 경우에 확보되는 무한정의 자유(소극적 자유)의 개념에서 적극적인 인간성의 실현을 위한 자유(적극적 자유)로의 전환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유의 개념을 도입하지 않고는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양극화의 심화, 공동체의 해체에 대응하지 못한다. 사회적 책임을 도외시한 형태의 자유의 방종, 무한정한 시장주의의 천명 등은 그것이 가지는 경제학적 논리 이전에 유기체로서의 한 사회의 종합적 발전을 저해한다.
이 때 ‘상생적 자유주의(이근식)’, ‘사회적 자유주의(J.S.Mill)’ 등의 기존의 논의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근식(2004)은 자유주의의 근간은 민주주의,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정치적 자유주의이며, 자유방임적인 경제적 자유주의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의 결함을 상생의 원리로 보완한 상생적 자유주의를 제창한다. ①만인의 사회적 평등, 개인인권의 존중, 독립과 자립의 원칙, 사상과 비판의 자유, 관용을 사회의 기본원리로 삼을 것, ②이의 실현을 위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확립할 것, ③자본주의의 실패를 시정하기 위한 정부의 개입을 인정할 것, ④노사갈등과 분배갈등을 포함한 사회갈등, 환경파괴, 국제분쟁 등의 공동의 문제에는 상생의 원리를 적용할 것을 주장한다. 자유주의에서의 사회적 성격(공동체성)을 강조한 존스튜어트 밀(J.S.Mill)의 주장도 참고할 만하다. J.S.Mill은 사유재산제도는 자본주의의 근간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많은 재산이 노력의 성과가 아니라 약탈이나 출생이라는 우연에 의해 획득된 경우가 많으므로, 현실의 분배는 매우 불공정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불공정한 분배를 막기 위해 상속과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제한해야 하며, 공공교육을 강화해야 함을 주장한다.
넷째로 결국 중요한 것은 따뜻한 사회와 민주주의의 중요성이다. 인간은 이기적이면서도 또한 상당히 이타적이다. 이기적인 욕망을 잘 조직하는 것이 시장에서의 활력을 유지하는 것이며 이타적인 따뜻한 마음을 잘 조직하는 것이 무너진 사회를 제대로 복원하는 길이다. “거대한 전환”을 쓴 칼 폴라니는 자기조정적인 시장이 인간본성에 내재한 사회성 혹은 공동체성을 해체하고 파괴하는 “악마의 맷돌”이며, 바로 그 해체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다. 시장기구란 인간사회와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며, 인간 삶을 유지시키는 사회의 안전을 맷돌로 갈아버리는 시장이란 계속 유지될 수 없으며, 결국은 필연적으로 사회(공동체)의 반격을 받게 됨을 강조한다. 시장기구 속에서 작동되는 인간의 이기심은 공동체를 유지시키려는 인간들의 노력에 의해서 제어 받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이 모든 것들은 개인들의 민주적 참여를 통해서 달성해 가는 것이다. 민주주의자 밀(J.S.Mill)은 그의 『대의정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통 사람들이 공공문제를 다루는데 서툴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일단 공적인 영역에 들어와 일을 취급하게 되면 그들의 생각이 깊어지고 정신 또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똑 같은 일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류 계층 사람도 공공문제에 관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커지고 안목도 높아진다.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고 들으며 그 자신의 지식도 넓어진다.”
필자는 민주주의자란 민중에게 주어진 더 큰 권력에 의해서 더 활기차고 더 행복한 나라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민주주의에 의해서 따뜻한 사회, 공동체를 만들려는 시민들의 의지가 잘 조직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는 이타성이 무한정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등가성의 원칙이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 나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는 확신, 즉 호혜성이 잘 작동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자원봉사자가 많은 나라, 기부가 일상화되어 있는 나라는 이러한 호혜성의 원칙이 잘 작동되는 나라다. 협동조합이 잘 발전되어 있는 나라도 그렇다. 1인=1표의 민주주의 원칙을 고수한다는 것은 부담(출자금)과 권한(지배력)의 등가적인 교환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장기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신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각주>

1.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문헌들이 존재하나, 여기서는 최원식/백영서(1997), 竹內好(1963) 참조.
2.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박홍규 역 2002)는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 만들어지는 존재론이자 인식론적인 구별(ontological and epistemological distinction)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에 불과하다고 보며(p.17), 그 배후에는 서양인들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성숙된데 반하여 동양인들은 비합리적이고 열등하며 유치하다고 하는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p.83).
3. E. Vogel(1991, 제5장)은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급속한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상황적 요인은 (1)이들 국가가 미국 및 국제기관으로부터 대규모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 (2)일본의 식민지 점령과 전쟁 등으로 인해 이들 지역에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보수적인 정치질서가 파괴되었으며,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과 이들 4나라에 세워진 새로운 정부들은 전통적인 엘리트에 덜 의존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를 고려하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정책결정을 할 수 있었던 점, (3)이들 나라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는 계속적인 군사적인 위협에 놓여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인구에 비해 제한된 영토와 자원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치,경제적 긴박감이 컸다는 점, 즉 이들 국가에 있어서 새롭게 형성된 정부들은 권위주의적 질서유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며, 군사,경제적 긴박감이 대중들에게 이러한 질서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였다는 점, (3) 일본 및 네 국가는 일하기를 열망했을 뿐 아니라 산업의 요구를 충족시킬 기술의 연마를 원하는 활용 가능한 새로운 노동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5)네 나라가 일본을 모델로 삼고 일본의 기술과 투자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을 열거하고 있다.
4. 이상과 같은 ‘긍정론’에 대해서 유교적 가치가 결과적으로 아시아의 경제위기를 가져왔다는 논리 또한 존재한다. 아시아의 경제발전은 유교적 가치에서 찾는 것이 불가능하며, 기타의 다른 요인들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교적 가치체계는 동양 특유의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를 형성시켰으며, 시장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개입도 결국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조장함으로써 아시아의 경제위기로 귀결되어 갔다는 점도 강조된다. 정실인사, 부패, 뇌물, 기업운영의 불투명성, 연고주의, 정경주착 등의 단어들은 모두 아시아적 가치, 유교적 특징으로 설명되며, 시장에 의한 규율, 개인의 책임, 정부역할의 축소, 개방화 등의 정책들이 아시아에서 지향해야 할 길이라는 논리 또한 일반화된다.
다소 저널리즘의 힘을 빌린 이상과 같은 논의를 적극적으로 개진해 나간 것은 크루그먼(Krugman)이었다. 이미 1994년 ‘Foreign Affair’지의 겨울호에 ‘아시아 기적의 신화(The Myth of Asia’s Miracle)’을 게재하여 아시아 경제발전의 한계를 지적했던 그는 이후 1997년의 경제위기 과정에서 그의 혜안(慧眼)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아시아의 경제위기를 정확히 예측했던 경제학자로 각광을 받게 된다. 저명한 국제경제학자로서, 특히 독점적 경쟁시장 모형(monopolistic competition market model)으로 산업 내 무역의 증가와 전략적 무역정책의 성공가능성에 대한 괄목할만한 연구 성과를 보여 왔던 그는 아시아 경제위기를 계기로 하여 일반인에게까지 유명인사로 부각되어 갔다. 그의 논지는 소위 ’도덕적 해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현재 위기를 겪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다…아시아 국가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특권을 누리면서도 책임은지지 않아도 되었기에, 너무도 쉽게 장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은행대출은 매우 위험한 부동산 투자와 어이없을 정도로 과욕적인 기업 확장에 이용되었다.”(Krugman 1998).
그러나 그의 논지는 아시아 경제의 장기적인 성장률 하락을 예측 했을 뿐이지 외환위기와 같은 경제의 급속한 붕괴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1997년의 아시아 경제위기를 단순한 아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80년대 중반의 영국의 파운드화 하락, 96년 멕시코의 페소화위기, 98년 러시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의 외환위기 등과의 연계 속에서 생각한다면 이러한 금융,외환위기는 일종의 금융시장의 패닉(panic) 속에서 그 이유를 찾아가는 것이 적당하다. 하버드 대학의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 1998), 그리고 세계은행의 부총재를 지냈던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2002)의 논리는 그러한 투기자본의 위험성이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러한 단기적인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한 인식은 크루그먼도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Krugman 1999).
5. 서병훈, 「좋은 정치, 이상적 민주주의: 현실정치에 묻다」, 자유주의연구회, 2016년6월10일 발제문.

 

<인용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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