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질문, 뜨거운 숙제, 그리고 미안합니다.

『협동조합 다시 생각하기』 . 신성식 저 알마 2014.04.09.

공정경, 아이쿱생협 언론활동팀

가슴 속 풀리지 않은 질문 하나가 있었다. 답을 찾지 못해 답답했던 차에 한 인문학 저자를 만났다. 얘기하던 중 저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묵직한 책도 읽고 토론도 일상적으로 했는데, 요즘 대학생들은 전혀 그런 게 없어요. 쯧쯧”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가슴 속 뜨거운 질문이 입에서 툭 튀어나와버렸다.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고 책도 많이 읽은 세대가 기성세대가 됐는데 왜 세상은 기대했던 것만큼 좋아지지 않나요?” 무례한 질문이었는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는지, 당시 저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순진한 기대가 있었다. 486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면, 내가 기성세대가 되면, 사회는 훨씬 자유롭고 살기 좋아질 거라는 기대… 하지만 486세대가 국회의원이 되고, 기업의 중요한 자리에 올랐는데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과거를 훈장처럼 자랑하고, 지금의 무기력한 젊은 세대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민주화를 향했던 열정만큼이나 금융적 이익을 향한 열정도 대단했다. 믿었던 선배세대라 그런지 실망도 컸다. 속이 상했다.

시간이 흘렀다. 가슴 속 질문도 먼지만큼 작아졌다. 크기는 작아졌지만 콕 박혀있어 벌겋게 부어오른 붓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뜻밖에 올해 그 인문학 저자에게 답을 들었다. 신간 서문에 ‘어느 486세대의 고해성사’라며 ‘미안하다’고 쓰여있는 게 아닌가. 꼭 나에게 한 말은 아니었지만, 뭐라도 들으니 먼지만큼 콕 박혀있던 질문이 시원히 사라졌다.

4월, 한 권의 책을 만났다. <협동조합 다시 생각하기> (신성식 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이번엔 내가 사과한다. “제가 섣불리 486세대를 판단했습니다. 제 판단이 틀려 다행입니다.”

<협동조합 다시 생각하기>는 아이쿱생협의 주요정책을 풀어놓은 책이다. 지은이는 협동조합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고민에 빠질 때마다 그 문제를 주제로 삼아 글을 써왔다. 수많은 사람이 얽힌 다중이해관계자 협동조합이라 고민의 내용 또한 종횡무진이다. 협동조합에서 조합원 결의가 높았던 적이 있었나? 많은 사람이 가치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왜 세계 경제는 협동조합이 아니라 자본기업이 중심이 되고 있을까? 자본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전의 협동조합이 겪었던 상황과 지금은 무엇이 다른가? 변한 소비자와 변한 생산자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효율을 추구하면서 일자리를 유지하는 방법은 없을까? 협동조합을 해야 하나?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기 위한 협동조합을 구성할 수도 있지만, 부산 가는 방법은 굳이 협동조합이 아니더라고 많고 다양하며, 그중에서 선택만 하면 되는 문제일 뿐이다. 지속 가능한 농업, 고용이 안정된 양질의 일자리 같은 요구들을 해결할 방법은 부산으로 가는 길에서는 찾을 수 없고, 달에 가는 것으로만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1장 협동조합 다시 생각하기)

사람들이 꾸는 꿈은 다르다. 달을 바라보며 살아생전 발자국은 찍지 못해도 가까이 다가가려 열망하는 사람이 있고, 달조차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지은이는 이상주의자이다. 달에 가고 싶어 안달 난 이상주의자. 몽상가와 달리 이상주의자의 눈은 매섭다. 극복해야 할 현실을 냉정히 바라봐야하기 때문이다. “아이쿱은 현재 주인 없는 조직이라는 현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10장 아이쿱의 활동가 정책은 어떠해야 하는가?)

자꾸 정신줄 놓게 되는 현실을 냉정히 하나라도 넘어야 이상에 한 발짝 가까이 갈 수 있다. “협동조합이 기업보다 구조적인 우위를 가지느냐는 ‘위험을 감수하거나 혁신가로서 일하는 활동가를 얼마나 많이 배출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이러한 ‘활동가 확대재생산 시스템’이 얼마나 잘 갖춰져 있는가에 따라 협동조합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우리에게 혁신은 선택사항이 아니다.”(같은 장)

해법은 경전에 있지 않고 현실에 있기 때문에 다 부딪치고 다 껴안는다. 그리고 증명한다.

“농민을 비롯한 생산자가 자신이 생산하지 않는 물품을 소비할 때의 태도는 전형적인 소비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브랜드와 가격정책은 유기농 쌀을 생산하는 사람이 우리밀 라면이 비싸다면서 신라면을 사는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정책수립은 객관성, 합리성이 유지되는 과학을 기초로 해야 한다.”(8장 아이쿱 브랜드 전략과 가격정책)

24년째 협동조합과 씨름 중인 지은이는 ‘협동조합은 사업에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 내린다.

사람 중심의 경제는 기업 이익과 사회 이익이 충돌할 때 사회 이익을 우선해 작동한다. 협동조합이 가치비용을 감당해야만 사람중심의 경제를 만들어갈 수 있다. 이를 실현해가는 과정은 분명히 평탄치 않다. 사람 중심의 경제는 어느 날 갑자기 사회가 바뀌는 혁명처럼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 하기 어려우면 같이하는 게 협동의 원리이다. 협동조합 생태계를 그리기 시작한다. 식물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생태계는 물을 중심으로 형성되는데, 협동조합 생태계는 사업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자본기업은 두발자전거와 같고 협동조합은 세발자전거와 같다. 두발자전거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계속 페달을 밟을 수밖에 없지만, 세발자전거는 빠르진 않아도 넘어지지 않는다. 자본 중심 기업에 없는 한 바퀴가 바로 협동조합 생태계이다. 넘어진다는 공포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세발자전거를 타야 한다. 세발자전거는 제자리에 있을 수도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인생이 행복해진다고 책은 말한다.(5장 협동조합 생태계 구출을 위한 구상)

10년 전 지은이는 <서기 2000년의 협동조합>을 만나, 레이들로 박사의 질문을 숙제로 받아들였다. 다른 길로 새지 않고 거듭 고민하며 성실히 문제를 풀어온 지은이를 보면서, 어찌 ‘486세대를 섣불리 판단해서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이 글을 빌어, 가슴 속 뜨거운 숙제를 버리지 않고 묵묵히 풀어온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