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어제의 협동에 박수를 보내나

『로치데일 공정선구자 협동조합 – 역사와 사람들』 조지 제이콥 홀리요크 지음. 그물코 펴냄. 2013.12.10.

공정경, 아이쿱생협 언론활동팀

19세기 러시아소설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등장인물이 많고 이름이 길다는 점이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작가의 이름조차 길다. 사회과학서로는 보기 드물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책이 있다. 한 장에 나오는 이름을 세어보니 43명이다. 주석 또한 많다. 돈에 관련된 숫자와 도표도 많고, 당시 자료의 인용도 아낌없이 실려 있다. 게다가 두껍다. 조지 제이콥 홀리요크의 <로치데일 공정선구자 협동조합 ? 역사와 사람들> (이하 로치데일 역사와 사람들) 다행히 줄 간격이 넓고 여백이 많다. 두껍지만 재생종이를 사용해 외국 원서처럼 가볍게 들린다. 책이 술술 읽히는 건 소설 같은 문체와 저자의 날카로운 위트 덕분이다. 심지어 얄미운 사람에게 점잖은 어조로 시원스레 욕도 해준다.

“ 세상에는 알고 지내기는 하지만 정신적으로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 많다. (…) 이런 사람들에게는 애정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이 죽더라도 우리는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

그동안 협동조합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교양서, 가이드북, 강의에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하지만 협동이 무엇인지 손에 잡힐 듯하면서 좀체 잡히지 않았다. <로치데일 역사와 사람들>은 그동안 몇 줄로 얼핏 보여준 협동운동 초기 로치데일협동조합의 기록을 396페이지로 펼쳐놓은 첫 완역본이다. 완역본이기에 구체적이다. 구체적인 것은 힘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똑똑한 협동이 멀리 있지 않고 손에 꽉 잡힌다.

애초 로치데일 사람들의 목표는 단순한 것이었다. “빚에서 벗어나고 싶다.”

당시 노동자는 외상거래로 삶이 얽매여있었고, 단 한 주라도 빚 없이 사는 게 꿈이었다. 그 줄을 끊어내는 것이 우선이다. 로치데일 사람들은 가정들이 빚에서 벗어나는 기술을 가르치고, 빚지지 않고 사는 삶이 얼마나 자유롭고 당당한지 느끼게 해준다.

지금 우리는 신용과 대출이라는 이름으로 빚에 얽매여있다.

당시에도 누구나 순정한 식품을 제일 좋은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 막상 순정한 식품을 보이면 거부한다. 진짜 맛을 몰랐기 때문이다. 로치데일 사람들은 미각 교육을 중요히 여겼다.

지금은 질 낮은 재료와 수백 가지의 첨가물이 우리의 미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당시 상거래의 원칙은 경쟁이었다. 경쟁이라기보다 속임수가 더 맞을듯하다. 로치데일 사람들은 속임수의 원칙 버리고 새로운 원칙을 만든다. 정직한 거래의 원칙. 누가 오더라도 정확한 눈금과 순정한 물품을 제공했다.

지금은 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워낙 세련되게 속여 우리는 속은 줄도 모른다.

로치데일 주인공들이 성공하는 과정을 보니, 뒤에는 숨은 조력자가 있었고, 내부에는 갈등유발자, 외부에는 불신과 질투의 공격자가 있었다. 아이쿱생협의 여러 조합이 오늘까지 오는 동안 이런 사람들이 꼭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170년 전 상황이지만 현재와 겹쳐 읽는 건 어렵지 않다.

제이콥 홀리요크는 타산지석의 조언도 세세히 들려준다. “이윤 적립의 원칙이 없으면, 협동은 사소한 일이 되고 만다. 이윤배분은 공정하게 해라. 사업을 확대해 자본을 재생산하는 능력을 키워라. 손 내밀지 않아도 조합원이 스스로 출자금을 내게끔 만들어라. 논쟁에는 이렇게 대처해라. 협동운동이 전진하도록 온 힘을 기울이지만, 개인의 자유를 해치는 일이라면 협동운동의 이익을 포기하겠다.” 등 당연하고 깨알 같은 조언이지만, 유심히 듣는 협동조합과 그러지 않은 조합은 생과 사가 갈릴 것이다.

지금의 협동조합 원칙과 조합원 윤리가치는 십계명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책 속 주인공들에게 닥쳐온 수많은 갈등, 갈등을 해소하려는 그들의 치열한 노력, 성공으로 끝난 해피엔딩…이런 과정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새겨진 것이다.

170년 전 로치데일 사람들, 현재 협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각각은 종교도 다르고 정치 사회 사상에 대한 의견도 다르다. 그러나 정직한 거래와 공정한 이윤배분으로 사회를 더 낫게 바꾸겠다는 뜻은 비슷하다. 고민도 비슷하다.

오래됐지만 새로운 인식인 협동, 낯설게 보는 사람에게 책은 말한다. 이미 누군가 지나간 길이고, 걸어갔던 사람들도 무사히 잘 도착한 길이라고. 똑똑한 협동을 묻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애써보라며 170년 전 그들이 애쓴 그 순간을 보여준다. 로치데일 선구자들의 집단지혜는 고민하는 사람에게 당장 쓸 수 있는 무기가 된다. 책 표지에 협동조합 고전이라 적혀있지만, 사회경제고전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만큼 가지가 풍성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혹 뭐가 이렇게 재미없나 싶어 책장을 덮어버린 사람은 기다려보자. 만나야 할 책은 꼭 만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