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의 진면목을 찾아서]

민주적 의사결정의 진화

김형미(전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장, 상지대 사회적경제학과 부교수, 제21대 한국협동조합학회장)

 

 

 

지난 칼럼에서 필자는, “협동조합의 민주주의가 1인 1표로만 소개되는 평등한 의결권 구조만을 반복 강조하는 담론 차원에 갇혀 있는 듯한 답답함”을 토로하였다. 협동조합의 창립기는 자원 제약도 많지만 무형 자산 차원에서는 매우 풍부한 자산을 보유한다. 열정과 신뢰가 넘치는 발기인=활동가들, 협동조합의 안착과 성공을 바라며 헌신하고 어지간한 점은 양보하고 타협하면서 제약을 뚫고 기업 활동의 성과를 내기 시작하는 혁신성, 무엇보다도 성공도 실패도 함께 결정했으니 같이 책임질 수 있다는 심리적 자산은 자원 제약의 부담감을 극적으로 감소시킨다. 이러한 창립 구성원들의 신뢰와 헌신적인 참여로 빚어진 집단적인 심리적 자산은 케인즈가 말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와 통하는 바도 있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협동조합 가치’에는 “협동조합 조합원은 선구자들의 전통에 따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 선구자들은 비단 로치데일 선구자들, 빌헬름 라이파이젠, 데자르뎅 부부, 장일순과 같은 인물들뿐만 아니라 무수한 협동조합의 창립 활동가들을 포함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창립기 협동조합의 특징을 협동조합의 신뢰와 협력, 규범의 네트워크 (사회자본, social capital) 강점으로 설명하고 그 요인으로 협동조합의 민주적 의사결정을 강조한다.1

 

성장·규모화와 동반하는 민주적 의사결정의 오작동

협동조합이 성장하고 성공하면 협동조합다운 운영구조를 지속하기 위하여 협동조합 법제가 상세해지고, 협동조합의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는 대체로 그러한 제도 틀 안에서 동질화하여 간다.

또한, 협동조합이 성장하면 창립기의 열정과 헌신적인 참여를 간직하는 구성원은 대체로 소수이기 쉽다. 창립 세대가 은퇴하고 성장기·성숙기의 협동조합의 과제와 조합원의 필요, 갈망은 창립기와 달라져서 조합원층의 분화와 이질성이 증가하게 된다. 이 시기에 많은 조합에서 내홍이 발생하기 쉽고, 여기저기서 갈등이 속출한다. 조합원(대의원) 총회는 최고 의사결정기관답게 숙의하고 결의하는 장이라기보다도 다수표로 결정하는 장이 되거나, 협동조합 경영 과제를 적시에 판단해야 할 이사회는 분열되어 의사결정을 미루거나 장기적인 전략 결정을 유보하면서 협동조합의 쇠퇴로 이어지는 사례도 다수 발생한다. 이 지경이 되면 일반 조합원이 민주적 의사결정에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길은 요원해진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적인 관심은 어떻게 해야 이 오작동을 멈추고 민주적 의사결정이 작동되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찾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다수결과 합의 방식 의사결정의 취약함과 의도치 않은 결과

다수결 투표와 합의는 협동조합에선 익숙한 방식이다. 수많은 실천을 통해 그 노하우와 기본규칙이 정비가 되어 있어 어느 조합이나 실천할 수 있다. 안건당 1인 1표라는 동등한 의결권, 투표에 참여하는 조합원들에게 공평하고도 충분한 정보 접근, 토론이 보장된다면 다수결은 조합원 전체의 의견을 확인할 수 있는 바람직한 의사결정 방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는, ‘시장은 치안이 보장되는 가운데 자유로운 경제 주체들이 수요와 공급에 맞게 완전 경쟁이 이루어지는 합리적인 공간’이라는 전제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더욱이, 협동조합에서 다수결 투표방식은 의도치 않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협동조합은 찬성하지 않는 조합원의 참여까지 이루어져야 성과를 높일 수 있는 사업체이다. 따라서, 다수결 투표 결과, 반대하거나 무관심한 조합원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런 방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합원의 참여를 제약하여 협동조합의 역량을 갉아먹게 된다.

이에, 많은 조합에선 숙의하고 합의하는 방식의 의사결정을 실행한다. 특히, 이사회 차원이나 규모가 아주 크지 않은 협동조합에선 합의 방식이 이루어질 때가 많은데, 합의는 회의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충분한 토론을 통해서 의견 대립을 해소하여 모두가 수용할만한 제안을 만들어 결정하는 행위이다. 합의의 가장 큰 강점은 모두가 토론에 참여하여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합의 과정에서 얻는 구성원들의 심리적 충족감이 고양되어 구성원 참여가 극대화한다는 점이다. 한편, 합의의 스펙트럼은 만장일치에서 인정·수용까지 그 범위가 넓은데, 합의의 결과물이 최적의 판단이라는 보증은 없다. 시간과 재정적인 제약, 토론과 숙의를 진행할 수 있는 태도와 효과적인 안내자가 없으면 합의 과정은 지리멸렬한 분위기에서 제약조건에 쫓겨서 마지못해 합의하는 결과가 산출되곤 한다.

다수결 투표는 협동조합에서 최종 의사결정의 절차로서, 합의는 장기 계획 및 사업 전환 등 시간을 충분히 투입하는 의사결정에 적당하다. 일상적인 경영 활동에서 이는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다수결 투표의 진화: 복수 투표제(Plural Voting)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의 <2026년 민주주의 보고서>는, 2020년대의 세계정세에서 독재화 수준은 1930년대보다 더 심각하다고 보고하며, 유럽연합 국가 중에서도 영국, 이탈리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가 새로이 독재가 진행되는 나라 순위에 진입했다고 밝혔다. 현재 이란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이스라엘은 48위, 미국은 51위로 추락했다. 빛의 혁명 이후 우리나라의 순위가 41위에서 22위로 상승한 점은 다행이지만 우리가 사는 현 세계 지도를 보면, 민주주의 시대가 흐트러지고 있으며 ‘망가진 민주주의 제도’를 어찌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민주주의를 재설계하려는 움직임도 구체화하고 있다. 대만의 디지털 장관을 역임했던 오드리 탕도 주도하는 비영리조직 Radical Change는, 현대 정치에선 1인 1표의 투표제가 다수결로 소수의 목소리를 지우고, 사회적 분단을 심화하는 장치로 오작동된다고 분석하고, 이를 수정하는 복수 투표제를 고안하여 주창한다. 복수 투표제는 가령, 다음과 같이 작동된다.

구성원에게 모두 동등한 포인트를 100점 부여한다. 핵심은 후보자가 아니라 의제에 투표하는 것. 구성원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의제에 자신이 부여하고 싶은 정도로 포인트를 부여할 수 있다. 포인트를 많이 부여할수록 표는 승수로 환산된다. 1포인트 부여는 1표이지만, 3포인트 부여는 9표처럼. 만약 구성원이 자신이 원하는 의제를 무리하게 밀어붙이기 위해서 과다하게 포인트를 부여하면 자신에게 부여된 100포인트를 순식간에 다 써버리므로 그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고 또 다른 의제에는 투표할 수 없다. 즉, 어느 하나의 의제를 무리하게 밀어붙이고자 표를 매수하는 비용을 높게 설계한 것이다. 아울러, 이 방식은 어떤 의제에 대해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소수자의 입장도 보호할 수 있다. 장애를 지닌 이들에게 교통시설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예산 배분은 매우 절실하다. 이 경우, 장애를 지닌 구성원들이 복수의 포인트를 부여하면 이들이 행사한 복수 표는 절실하지 않으니 그저 1표만 던진 경우보다 더 많아질 수 있다.

이런 원리의 복수 투표제는 2019년 이후 대만의 총통 선거, 2019년 브라질의 그라마도 시, 2023년 내슈빌 지하철위원회의 투표 시에도 적용되었다는 게 이 조직의 설명이다.

 

합의보다 동의 방식에 기반한 거버넌스: 소시오크라시

2019년 무렵부터 영국의 협동조합계에선 협동조합의 갈등 해결, 민주적 의사결정에 소시오크라시를 도입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소시오크라시는 데모크라시를 넘어선 의사결정 방식으로 우리 말 표현을 찾기 어렵지만, 영국협동조합연합회(Co-operatives UK)는 관련 안내 책자를 공표하고 협동조합과 적용 실험을 해보는 등 그 노하우를 개발·전파하고 있다. 소시오크라시의 방법은 사업·활동팀 단위인 써클 간의 관계, 동의 방식의 의사결정 방식을 채택한다. 소시오크라시에선 1인 1표가 아니라 1인 1 의견(one member, one voice)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구성원의 동의 기반 거버넌스로 구현된다.

합의(consensus)와 동의(consent)는 어떻게 다른가. 두 개념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합의가 구성원들이 일정한 수준의 이해를 공유하고 모두가 수용 가능한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이라면, 동의는 다수의 구성원 가운데 반대가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즉,동의는 다른 구성원의 의견을 수용하고, 함께 하는 것이다. 독재 체제나 수직적인 조직 문화에 대한 반감, 반작용이 큰 우리 사회에서 동의는, 권력이 센 리더를 추종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지만, 회의에서 동의는 필수적인 의사결정 행위 중 하나다. 동의 문화가 정착하면,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에서 반드시 합의나 약속, 준수를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 구성원은 해당 의제가 비록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결과물이 아니더라도 이게 해로움이나 배제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더 포용적이고 효과적으로 결정하여 각자 실행에 옮길 수 있다.

이러한 동의 방식이 주목받는 이유는, 협동조합이나 비영리조직에서 실행되는 합의 방식의 의사결정의 한계에 많이 봉착했기 때문이다. 합의만을 우선하게 되면, 해당의제에 관심이 낮거나 참여가 어려운 구성원에게 강요가 될 수 있고, 또한 이를 빌미로 구체적인 실행과정에서 구성원을 지나치게 압박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게다가 현실적으론 모두가 합의하기 전에는 실행이 어려워지거나 리스크 부담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합의를 고집하면서 협동조합 일상 운영의 힘을 빼는 교착상태를 만들기도 한다.

 

그림. 관용의 범위 틀거리로 생각하는 동의

image01출처: 동의 기반 거버넌스, Circle Forward, 영국

 

필자는, 오늘날 한국 협동조합의 긴요한 과제로서, 다수결과 합의라는 보편적인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이 지니는 취약함을 직시하고 이를 보완하거나 대체할만한 의사결정 방식을 찾아서 협동조합의 민주적 의사결정의 오작동을 수정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우리나라의 협동조합법제는 1인 1표의 의결권제도를 법적 강제조항으로 명시하고 있으므로 총회에서 복수 투표제를 도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합원의 의견 수렴, 이사회 운영, 조합원 활동 단위 및 일상 경영 단위에서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의 진화가 일어난다면, 언젠가는 법제도 그에 걸맞게 바뀌지 않겠는가.


  1. 그 원조는, 로버트 퍼트남의 <사회적자본과 민주주의 (Making Democracy Work)>일 것이다. 협동조합을 1인 1표의 의결권을 지닌 사람 중심의 기업으로 1주 1표의 의결권으로 작동되는 투자자 중심 기업과 대조하는 협동조합 담론에서 강조하는 측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