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케티가 말해주는 것

 

 

김종걸(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원장)

 

지난 몇 년간 빈곤과 불평등이 이야기되는 곳에는 항상 피케티(Thomas Piketty)의 이름이 같이 거론되어왔다. 사실 피케티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했던가는 중요하지 않다. 피케티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 또한 많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이미 빈곤과 불평등을 상징하는 학자가 되어버렸다. 피케티와는 상관없이 피케티 현상이 벌어지는 현실, 아마도 그는 학자로서 최대의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한때 경제성장과 함께 경제적 불평등은 감소할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발휘했던 적이 있었다. 쿠즈네츠(Simon Kuznets)의 역(逆) U자 가설이 그것이다. 경제성장단계의 초기에는 경제적 불평등이 증가하지만 어느 시점 이후에는 점차 평등한 경제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쿠즈네츠는 1913-48년 미국의 소득불평등의 통계를 정비하던 중 이러한 형태의 곡선을 도출했다. 그러나 그 내부의 메카니즘을 설명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불평등의 증가가 경제발전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개도국의 경우 노동시장에는 과잉노동력이 존재하며, 그 과잉노동력이 전부 소진될 때까지 임금은 항상 낮은 단계로 유지될 것이라고 본다. 197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루이스(Arthur Lewis)가 “무한탄력적 노동공급곡선”이라고 일컬었던 상황이다. 그리고 이 시기가 지나면 임금도 자연스럽게 올라갈 것으로 생각했다.1) 참고 지내다보면 경제적 불평등은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논리, 그러한 낙관론이 1960년대라는 세계경제 팽창기와 어울려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갔다.

그러나 세상에 경제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욱 확대되어 갔다. <표 1>는 각국의 소득수준과 불평등과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단순히 보기에도 그 관계가 명확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에티오피아는 극심한 저소득국이기 때문에 불평등이 낮을 수 있다. 그러나 모잠비크나 잠비아 같은 나라는 가난한 나라임에도 극도로 불평등하다. 선진국 중 미국의 불평등도는 중진국인 인디아, 불가리아, 인도네시아, 이집트 등보다 높다. 소득수준과 불평등 간에 일정한 경향성은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이제 피케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적 성장의 특징이나 시장경제 법칙과 같은 어떤 것이 부의 불평등을 줄이고 조화로운 안정을 달성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라고 말이다(피케티, 450쪽).

경제학 분야에서 영미권의 경제학자(혹은 영미권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경제학자)가 아닌 사람이 이러한 권위를 취득하기는 어렵다. 프랑스는 유구하며 독특한 지적전통을 가지고 있음에도 경제학 분야에서 전 세계 표준의 명성을 획득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피케티는 혜성처럼 나타나 그가 쓴 <21세기자본>은 단기간에 전문서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었을 것 같았던 100만부의 기록을 금방 갈아치웠다.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처음 영문판이 나왔을 때에는 많아봐야 몇 만부 팔릴 것으로 생각해서 번역료를 무료로 계약했던 저명한 번역자 골드해머(Arthur Goldhamer)만 억울했던 것이다.

미국경제학계의 압도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Robert Solow(1987년 노벨경제학상), Paul Krugman(2008년 노벨경제학상)이 피케티를 극찬하며 선전해 준 것도 큰 영향이 있었다.2)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더욱 큰 것은 2008-9년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월스트리트 점령운동(occupy wall street)을 통해 자본주의 내부의 커다란 불안정요소가 존재하고 있다는 인식이 모두에게 팽배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학의 불신, 자본주의의 불신이다. 그리고 피케티가 그 의심에 합리적인 근거를 준 것이었다.

피케티의 주장은 아주 단순하다. 그는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적 부는 점차 소수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부의 상속을 통해 상위 1%가 지배하는 세습자본주의로 되어 갈 것이라고 우울하게 결론 맺는다.

그는 아주 단순하며 강력한 몇 가지의 증거로 증명해낸다. 먼저 알아야 할 개념은 바로 자본분배율(α)이다. 국민소득에서 자본에게 귀속되는 부분을 말하며 개념상 자본분배율(α)은 자본수익률(r)에 자본/소득비율(β)을 곱한 것과 같다. 한단위의 국민소득을 생산하는데 투여되는 자본의 양에, 그 자본수익률을 곱한 것이 바로 한 단위 국민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항등식(α=r*β)이나 이것을 피케티는 자본주의 제1기본법칙이라고 말한다.3)

조금 복잡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장기적으로 자본분배율이 커 갈 것인가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자본분배율이 상승한다면 자본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부가 축적되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알아야할 지표는 바로 자본수익률(r)과 자본/소득비율(β)이다. 그리고 자본의 불평등상황이다. 그래서 그는 소득세, 재산세, 상속세 등의 자료를 정비하여 소득과 부의 불평등 통계를 만든다. 국민소득. 자본/소득비율 등의 자료도 국가별(미국/프랑스/영국 등), 계층별(상위1%, 10%, 10-50%, 하위50%)로 1800년대 중반부터 정비해 나갔다. 통계정비작업을 끝내고 난 후 피케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첫째, 자본주의의 긴 역사를 통해 자본수익율(r)은 경제성장률(g)을 넘어서는 경향이 강하다(r>g).

일반적으로 경제성장률이 하락하면 자본수익율도 하락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특유의 유연성으로 노동자를 자본으로 대체해 나가며(대체탄력성이 1보다 높으며) 상대적으로 높은 자본수익률이 유지시켜 간다.4) 자본수익율이 경제성장률보다 컸다는 것은 한 나라에서 생산된 부가가치 중 자본이 가져가는 부분, 즉 자본분배율이 점차 높아졌음을 말한다. 과거에 축적된 부가 현재의 생산과 임금보다 더 빨리 증가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우는 것이다.”(피케티, 690쪽).

둘째, 경제성장률보다 자본수익률이 높다면 장기적으로 국민소득을 생산해나가는데 필요한 자본(설비/주택/토지 등)의 비율은 더욱 높아진다. 피케티는 이 비율을 자본/소득 비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본/소득 비율은 장기적으로는 저축율과 성장률의 비율에 비래하며, 이 경향을 자본주의 제2기본법칙이라고 명명한다(β=s/g).

위의 2가지 조건을 합친다면 당연히 자본분배율(α)은 상승해간다. 그리고 최근 이러한 현상이 더욱 강화되어 갔음을 그는 강조한다. 1970년대에는 15-20%였던 선진국의 자본분배율은 지금은 25-30%로 커졌다. 자본가에게 그리고 유산을 많이 받은 금수저들에게 점차 유리한 경제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1800년대 중반부터 따진다면 미국 혹은 유럽은 U자형태의 불평등구조를 나타낸다. 높은 불평등의 시기(1920년대까지), 불평등의 완화시기(1930년대-1970년대), 불평등확대시기(1980년대이후)로 나누어진다. 1930-1970년대를 통한 불평등의 완화는 자본수익률에 대한 누진과세와 최저임금제도의 도입 및 인상, 양차대전을 통해 자산이 파괴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자본/소득비율을 하락시키고, 실질 자본수익률을 저하시켰던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과거 1800년대 후반의 극심한 불평등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이 피케티의 주장이다.5)

피케티가 이리 유명해 진 이유는 바로 현대경제학에 있어서 불평등의 문제를 전면으로 제기한 학자들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다.

원래 경제학은 분배의 문제를 중요시했었다. 리카도는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토지가격의 토지가격 및 지대의 상승이 가져올 우울한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었다. 지주, 자본가, 노동자가 어떻게 나누어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마르크스도 그랬다. 이윤율 하락을 막기 위한 자본가의 노력은 결국 자본가 간의 갈등(제국주의), 혹은 자본과 노동 간의 갈등(노동자혁명)으로 나타나는 것을 예견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현대경제학 체계에서 불평등문제는 경제학의 주제에서 벗어나버렸다. 모든 이론의 중심은 미시적 경제주체의 최적행동의 이론으로 경제학이 변모되었으며, 계층간/국가간 갈등의 요소가 경제학체계 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더구나 모든 국가는 미래에 경제성장을 할 것(Rowtow 식의 경제발전단계론), 경제성장을 하면 빈부격차가 자연히 줄어들 것(Kuznets의 역U자가설)이라는 낙관론이 팽배했던 것에 대한 불만이 바로 피케티 열풍으로 나타난 것이다.

또 하나 페케티가 유명해진 이유는 그가 오만한 경제학 지상주의의 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의 미국식 경제학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경제학 분야는 역사적 연구 및 다른 사회과학과의 협력을 등한시하면서 수학에 대한, 그리고 순전히 이론적이며 흔히 이념적인 고찰에 대한 유치한 열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피케티 46쪽).

경제학적 수식의 바탕에는 사람간의 갈등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이 바로 정치다. 그러나 사람이 안 보이는 아름다운 수식 속에서 기존의 경제학이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 피케티는 영 못마땅하다. 피케티는 그러한 면에서 정치학, 역사학과 같은 타 분야에 대한 존경심이 강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에서 경제학자들은 학계와 지식인의 세계에서 또는 정계와 금융계의 엘리트 사이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학문분야를 무시하거나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더 높은 과학적 타당성을 어리석게 주장하는 일은 제쳐두어야 한다”(46쪽).

결국 경제학적 해석은 경제학 내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른 학문과의 공동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피케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부의 분배의 역사는 언제나 매우 정치적인 것이며, 순전히 경제적인 메카니즘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32쪽).

대단한 학자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래도 피케티는 아쉬운 면이 많다. 논의를 단순화시키는 명석함, 오타쿠와 같이 통계를 정비해 나갔던 집요함, 그리고 경제학/정치학/문학 등의 각종 고전에 대한 해박함 등 학문의 대가가 가져야할 요소를 그는 참 많이 가졌다. 그래도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첫째 해법이 너무 단순하다. 그는 자본세/누진과세/최저임금인상 등의 해법을 제시한다. 그 해법이 가능한 조건, 정치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분석에서 그리 명쾌하지 않다. 정치학적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나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는 빼 놓고 있는 것이다.

둘째, 앞의 논리와 관련해서 말한다면 자본세/누진과세의 문제는 개방경제 하에서의 자본이동을 감안한다면 쉽게 쓸 수 있는 정책옵션이 아니다. 피케티는 국제공통의 자본세(토빈세)를 말하나 이것은 거의 공상수준에 가깝다.

셋째, 기술의 변화에 대한 분석이 너무 약하다. 현재 빈부격차의 최대문제는 자본이 아니라 자본을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의 문제일 것이다. 4차산업혁명이 가져오는 충격과 관련된 일이다만 이에 대한 분석은 앞으로 더욱 필요할 듯하다.

넷째,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빈부격차를 없애기 위해 누진세를 걷어야 한다는 점이 아니다. 인류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부자의 세금을 써야한다는 것을 관철하는 것은 그래도 가능하다고 본다. 정작 어려운 것은 돈을 걷는 것이 아니라 쓰는 방법이다. 관료주의의 팽배, 복지이익집단의 강고화, 타인의존증의 강화 등의 모습이다.

복지국가는 예산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그 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할 정부의 능력, 타인의존증으로 전락하지 않을 시민사회의 능력에 의존한다. 우리가 사회적경제를 중요시 하는 이유도 관료주의를 대체할 시민의 자발성을 확대시키며, 협력과 호혜에 의해서 경제에 있어서 시민의 자기결정권을 확대시키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피케티는 상아탑의 훌륭한 학자는 맞을지 모르나 행동가로서는 거의 초보적인 수준이다. 그래도 차분히 빈부격차의 이론과 역사를 정리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앞으로 노벨상을 주어도 충분한 학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끝).

<표 1> 각국의 소득과 불평등

Michael P. Todaro, Stephen C. Smith, Economic Development, 11thedition, 227쪽.

 

<그림 1> 부유한 국가들에 있어서의 자본소득분배율, 1975-2010 (책 268쪽)

<그림 2> 유럽과 미국의 부의 불평등 비교, 1810-2010년 (책 419쪽)

1) “무한탄력적 노동공급곡선” 하에서는 자본가는 투자를 하면 할수록 점차 더 많은 몫을 가져가게 된다. 과잉인구상황에서 일종의 잠재적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얻고 근대적인 생산활동에 종사하게 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비록 자본투자자의 몫이 점점 더 커진다고 해도 절대적인 빈곤은 없어질 것이며, 다양한 형태의 소자본 소유자의 부도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가 계속 유지된다면 무한탄력적(수평의) 노동공급곡선은 우(右) 상향의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노동공급곡선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후 추가적인 자본투자는 임금의 상승을 가져올 것이며 이에 따라 자본축적의 황금시대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2) 골드해머, 소로, 크루그먼의 피케티에 대한 글들은 『애프터 피케티 (After Piketty,21세기 자본 이후 3년)』(율리시즈출판, 2017.11) 참조.

3) 피케티에 있어서 자본의 개념은 노동에 반대되는 모든 재산권과 동일하다. 기계설비, 토지, 지적재산권 등의 모든 것을 말하며, 따라서 자본수익률은 이러한 자본에서 얻는 이윤, 배당금, 이자, 임대료, 기타 소득을 자본총액에 대한 비율로 나타낸 것이다. 『21세기 자본』(글항아리, 69-73쪽, 이하의 인용글은 모두 21세기 자본).

4)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시장이 잘 작동된다면 부의 불평등은 과연 해소될 것인가. 이에 대해 피케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이론에서 양극화의 주된 요인인 연평균 자본이익율>경제성장률(r>g)라는 기본적인 부등식은 시장의 불완전성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사실 그 반대다. 자본시장이 더 완전할수록 r이 g보다 커질 가능성도 존재한다.”(피케티, 40쪽).

5) 사실 미국이 유럽보다 원래부터 불평등했던 것은 아니었다. 1810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유럽은 미국보다 훨씬 불평등했다. 이것은 영국, 프랑스, 독일만이 아니라 북유럽의 스웨덴, 덴마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유럽의 자본/소득 비율은 급속히 하락했다. 전쟁의 영향으로 대규모의 자산파괴가 벌어졌으며, 전쟁 후의 사회 안정을 위해 누진적 자본과제가 커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에는 미국와 유럽의 불평등도는 역전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자본축적은 급속히 회복(자본/소득 비율의 상승)되고 있으며, 자본수익률 또한 경제성장률을 상회한다. 이에 따라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은 증대되고 있다. 만약에 높은 최저임금, 높은 자본누진세율 등과 같은 ‘제도’가 무너진다면, 유럽의 불평등은 1910년 이전 단계로 회귀하거나 어쩌면 더욱 높아질 수 있다고 그는 전망한다(피케티, 6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