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어떻게 개혁되는가(1) : 논어와 맹자

 

김종걸(한양대 글로벌사회적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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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떻게 개혁되는가(1): 논어와 맹자

1. 공자와 맹자라는 사람

1) 우리의 문화적 유전자

“세상은 어떻게 개혁되는가?”라는 질문은 ①세상은 어떻게 개혁되어야 하는가? ②세상은 누가 개혁하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을 포함한다. 필자가 공자(BC.551~BC.479)와 맹자(BC.372~BC.289)를 가장 먼저 선택한 이유는 이들이 필자가 생각하는 개혁가(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의 중요한 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주1)(주2)(주3).

이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믿었고, 사랑과 평화의 힘을 믿었다. 섣부른 술수를 쓰지 않고 진심으로 모든 일을 대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매일 실천했으며, 바른 실천을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성찰했다. 비록 그 길이 부귀영화와 상관없을지라도 꿋꿋이 즐기며 걸어갔다. 특히 맹자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은 도덕정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유력한 무기였다. 성선설의 기반 위에서 개개인의 도덕적 행위는 집안과 마을, 그리고 나라 전체의 도덕적 행위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이들은 또한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도덕적 실천을 감행했다. 스스로가 도덕적이지 않으면 남을 감화시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기성찰과 실천의 과정이 인간내면의 단단한 윤리적 신념, 맑고 넓은 기운인 호연지기(浩然之氣)로 축적된다고 믿었다.

지식인의 자기수양과 실천은 백성을 위해 존재했다. 이들에게 백성이란 단순히 부국강병의 수단이 아니었다. 사람이기 때문에 중요했다. 공자와 맹자는 “금수와 사람”을 항상 구분했다. 그 사람들 간에는 신분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는 예를 갖추어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자로 받아들였으며, 맹자는 백성이 가장 무겁고 군주가 가장 가볍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민(爲民)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공자와 맹자는 멀고 험난한 천하주유의 길을 걸어갔다.

생각해보면 공자 속에는 다양한 이론적 가능성이 존재했었다. 그것을 맹자는 성선설로 정리하고, 이를 또 다시 인간의 4가지 본성(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분해했다. 이 본성으로부터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4가지 도덕률로 발전시켰다. 맹자의 정치론은 도덕정치(왕도정치)라는 외눈박이 정치였다. 그가 상정한 나라는 성군(聖君)의 덕에 이끌려 열심히 일하는 좋은 신하와 백성들이 살아가는 그런 ‘행복한’ 나라였다. 그러나 공자의 적통승계를 경쟁하던 순자(苟子, BC.323?~BC.238?)는 보다 현실적이었다. “(맹자의 성선설)은 잘못된 말이라 나는 생각한다. 사람을 본성대로 내버려 두면 그의 질박함도 그의 자질도 떠나버려 결국 선한 것을 반드시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순자』, 779쪽)(주4). 그는 인간본성의 ‘선함’을 믿지 않았다. 당연히 정치에 있어서 예(禮)만이 아니라 법(法)도 강조했다.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은 맹자의 도덕정치란 외눈정치를 덕치와 법치의 겸용이라는 양눈정치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공자의 적통은 순자가 아니라 맹자로 이어졌다. 그렇게 인정받기에는 1000년이라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다. 당나라 시대의 한유(韓愈, 768-824)는 유학의 진정한 전승계보를 주장하는 도통론(道統論)을 주장하며, 맹자를 공자와 연결시켰다.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을 거쳐, 성인의 도가 공자와 맹자에게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남송시대의 주희(朱熹: 1130-1200) 또한 『대학』은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의 저술이고, 『중용』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의 저술이라고 단정하고, 『사서』는 공자로부터 증삼과 자사를 거쳐 맹자에게로 이어지는 유학의 ‘도통’을 이어받는 경전이라고 강조했다.(주5).

공맹사상은 성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사회를 지배했다. 부모에게 효도(孝)하고, 윗사람에게 공손(悌)해야 한다. 진심(忠)을 다해 사람과 나라를 대해야 한다. 정치란 덕(德)으로 하는 것이다. 사람이란 어질고(仁), 의로워야 하며(義), 신의(信)를 지켜야 한다. 조선의 지식인은 일생동안 논어(주6)와 맹자(주7)를 수백번, 수천번 읽었다. 공맹사상은 일상의 행동지침이었으며, 소통하는 언어였다. 조상에게 전승받은 지혜였고 후세에 당부하는 가치였다. 할아버지 무릎팍에서 곰방내음 섞여 들었고, 출사(出仕)라는 청운의 꿈과 함께 소리 내어 읽었다. 정적과 논쟁할 때 인용하고, 은일(隱逸)하여 제자를 가르칠 때 또 다시 읽고 해설했다. 그리고 귀양살이 마음달랠 때에도 읽고 또 읽었던 책이었다. 그들에게 공자는 지성(至聖)이었고 맹자는 아성(亞聖)이었다. 우리가 쓰는 일상의 언어도 이들에게 빚진 것이 많다. 과유불급, 호연지기, 오십보백보, 국정농단의 ‘농단’과 같은 표현은 모두 『논어』와 『맹자』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그 유명한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도 “한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른 것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라는 논어 자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었다. 멀리 제주도에 귀향 간 스승에게 책과 차 등을 가져다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고마움을 논어의 한 구절로 표현한 것이다.

공맹의 사상은 우리를 얽매는 고리타분한 가치관이었다. 조선시대 왕도정치란 불과 몇몇 사례만이 존재했다. 현실은 법과 원칙이 상실된 권력자의 패거리정치가 난무했다. 거듭된 당쟁과 사화는 그럴듯한 명분을 앞에 둔 밥그릇싸움에 불과했다. 사회전체는 도달 못할 높은 가치관에 억압당하고, 이를 만회하듯 형식적인 예의범절과 제사의례가 난무했다. 공자는 모든 일에 진심을 다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가 큰 곳에서 진심이란 가장 큰 위험요소로 전락할 뿐이다. “말과 낯빛을 꾸미는 것은 나쁜 것”(巧言令色鮮矣仁)이라고 말했으나, 교언영색은 살아남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맹사상에서 떠 올리는 이미지는 이러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제 다시 공맹사상을 꺼내는 이유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개혁가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동양사회에 기득권으로 장착된 딱딱한 각질을 벗기고 난 후 보이는 인간 공자와 맹자의 모습 때문이다.

2) 세상을 바꾸려는 개혁가

공자와 맹자는 평생 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라는 험난한 세상에 이들의 개혁에 기울이는 권력자는 없었다(주8). 그럴수록 어짊(仁)과 의(義)의 깃발을 들고 더욱 더 천하를 돌아다녔다. 공자는 35세 때 첫 번째 정치적 망명을 떠났다(주9). 그러나 제나라에서 명재상 안자(晏子)에게 사람취급을 못 받고, 송나라와 위나라에서는 그대로 쫓겨나서,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공자는 중도(中都)라는 곳의 수령(宰)이 되었으며, 건설담당책임자(司空), 법무부장관(大司寇), 수상(宰相)대리 등으로 승진은 빨랐다. 정치적 성과도 꽤 좋았다. 「공자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공자가 정치에 참여하고 정사를 들은 지 석 달이 되자 양과 돼지를 파는 사람들이 값을 속이지 않았고, 남녀가 길을 갈 때 떨어져 갔으며,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어가지 않았다(『사기세가』, 651쪽).” 노나라를 침략하려던 제나라와 협곡(夾谷)에서 성공적인 외교적 담판을 이끌었으며, 삼환씨(三桓氏)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 성채의 일부를 헐어트리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결국은 55세 장년의 나이에 다시 나라를 떠나게 된다(주10). 그리고 14년간에 길고 험난한 천하주유의 길이 걸었다.

공자는 위, 진, 채, 광, 조, 송, 초, 정 등 양자강 이북의 나라들을 부지런히 헤매고 다녔다. 교통도 치안도 엉망이던 그 시절에 먼 거리를 여행하기란 극히 곤란한 것이었다. 때로는 배고픔에 굶주리고, 도적을 만나 죽을고비도 넘겼다. 상갓집 개라는 표현의 효시가 되는 공자의 다음 이야기는 그 고생의 정도를 보여준다.

「공자가 정(鄭)나라로 갔었다. 제자들과 서로 길이 어긋나 공자 홀로 성곽의 동문에 서 있었다. 정나라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자공에게 일러 말했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堯)임금과 닮았고, 목은 순(舜)임금 때의 현인이었던 고요(皐陶)와 닮았습니다. 어깨는 정(鄭)나라의 명재상 정자산(鄭子産)과 닮았는데, 허리 이하는 우임금보다 세 치가 짧고, 풀죽은 모습이 마치 상갓집 개와 같습디다.

자공은 그 이야기를 공자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공자는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그린 내 모습이 꼭 맞을 수는 없지만 상갓집 개와 비슷하다고 한 것은 맞지! 맞지!”」 (『사기세가』, 655-656쪽).

그래도 그의 신념은 강했다. 공자가 진나라로 가려고 광성(匡城) 땅을 지날 때였다. 키가 아주 컸던 공자를 마을 사람들은 악독한 장군 양호(兩虎)로 오해하고 생명을 위협했다.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갈 때도 그랬다. 그 때 공자는 제자들에게 커다란 나무 아래서 예의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다. 평소 공자의 학문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던 송나라의 사마(司馬) 환퇴(桓?)는 공자가 자기나라로 오지 말라고 협박하며 그 나무를 뽑아버렸다. 이 모든 때에 공자는 언제나 태연히 대응했다. “주나라 학문이 나에게 전해진 것이 하늘의 뜻이거늘 광 사람들이 어찌하겠는가?”(자한:5). “하늘이 내게 덕을 부여하셨거늘, 환태가 나를 어쩌겠는가?”(술이:22).

공자는 만년에 자신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志于學). 서른 살에 확고하게 섰고(而立), 마흔 살에 사리에 의혹되지 않았다(不惑). 쉰 살에는 천명을 알았고(知天命), 예순 살에는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다(耳順). 일흔 살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從心所欲不踰矩).”(위정:4). 공자가 말하듯이 50대 나이는 지천명(知天命)의 시기였다. 자신의 길이 하늘의 뜻과 통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공자에게 ‘하늘’이란 구체적인 인격신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늘이란 인간의 삶을 이끌어주는 추상적인 그 무엇이었다. ‘자연’ 혹은 ‘운명’과 같은 의미로도 읽힌다. 공자의 관심사는 언제나 인간이었다. 인간이 해야 할 일 만을 공자는 이야기했다. 그러나 자신의 길이 무엇인가 운명이 이끄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는 순간 공자는 커다란 힘을 얻었음에 틀림없다(주11).

맹자 또한 40세가 넘어 천하를 주유했다. 70세에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많은 군주를 만났다. 『맹자』 속에 보이는 강한 주장들은 그의 뜨거운 열정을 잘 나타낸다(주12). 그래도 맹자는 공자보다는 사정이 좋았던 것 같다. 그가 살던 시대가 전국시대였기 때문이다. 전국시대는 진정한 의미의 약육강식의 시대였으며, 그래서 제후들은 백가쟁명의 재사(才士)들에게 무척 후하게 대했다. 후하게 대접은 했으나 맹자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제후는 없었다. 사마천 사기의 「맹자·순경열전」에는 이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맹가(孟軻)는 학문의 이치를 깨우친 뒤 제나라 선왕(宣王)을 섬기려고 했다. 그러나 선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양나라로 갔다. 양나라 혜왕도 입으로만 찬성하고 실제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주장이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서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진나라는 상군(商?)을 등용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병력을 강화했다. 초나라와 위나라는 오기(吳起)를 등용하여 싸움에서 이겨 적국을 약화시켰다. 제나라 위왕과 선왕은 손자(孫?)와 전기(田忌) 같은 인물을 기용하여 세력을 넓혔다. 천하는 바야흐로 합종과 연횡에 힘을 기울이고 남을 침략하고 정벌하는 것만을 현명하다고 여기던 때였다. 그런데 맹가는 요임금과 순임금과 (하, 은, 주) 삼대 성왕들의 덕치만 부르짖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사기열전(1권)』, 363-364쪽).

맹자의 말을 잘 따르려고 했던 사람은 작은 나라인 등(?)나라 왕이었다. 어느 날 등나라 문공(文公)이 맹자에게 물었다. 우리는 작은 나라로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데 어디를 섬겨야 합니까? 맹자는 난감해하며 대답했다.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이 터지면 성의 해자를 깊게 파고, 성벽을 높이 쌓고, 백성과 죽을 각오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맹자양혜왕(하):20). 맹자는 큰 나라 같았으면 자신 있게 인의정치가 부국강병의 길이라고 강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의정치는 작은 나라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주13). 그래서 맹자는 강력한 제나라와 양나라 임금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거기에서라면 왕도정치가 잘 작동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맹자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3) 위대한 스승

『맹자』는 논쟁서다. 그래서 인간 맹자의 모습을 추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논어』와 『사기』 등 각종 기록물은 인간 공자에 대한 풍부한 사례를 제공한다. 그 자료들 속에 나타난 공자의 모습은 참으로 위대한 스승의 모습이다(주14). 공자학당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었으며 차별도 없었다. 공자는 마음을 표현할 아주 사소한 예물(束修)만 가지고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학생으로 받아주었다(술이:7)(주15).

공자 교육방법의 최대특징은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가르치지 않았으며, 몰라 답답해하지 않으면 대답해주지 않았다고 말한다(술이:8). 스스로 깨우치는 것의 중요성은 맹자 또한 강조한다. “스스로 터득하면,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편해지고, 행동하는 것이 편해지면, 얻는 것이 풍부해지며, 얻는 것이 풍부해지면 옆의 사람도 그를 따르게 된다.”(맹자이루(하):107).

이러한 교육에서는 당연히 제자들의 성격에 따라 교육방법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공자가 두 제자에게 서로 다른 대답을 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례다. “옳은 말을 들으면 곧 실천해야 됩니까?” 자로가 물었을 때 “부형이 살아계시는데 어찌 그리하겠는가?”하고 대답했다. 염유에게는, “들었으면 바로 실천해야지!” 하고 대답했다. 의아히 여긴 제자 공서화가 그 이유를 물었다. “염유는 머뭇거리는 까닭에 나아가게 했으며, 자로는 넘치는 까닭에 억제시킨 것이다”(선진:21). 초대형강의실에 학생들을 몰아놓은 현재 대학에서는 도저히 흉내 내기 어려운 교육방법이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가감 없이 말하는 스승이었다. 수제자인 안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두 번 혹독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논어가 재미있는 것은 공자의 일상의 언어가 여과 없이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인간 공자가 상상의 스크린 속에 그대로 투영된다. 다음의 자공과 나누었던 대화는 공자의 교육방식을 잘 보여준다.

「군자는 그릇 같은 것이 아니다(君子不器).」(위정:12).

「자공이 여쭈었다. 저는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그릇이야.

어떤 그릇입니까? 종묘에서 쓰는 호련이지.」(공야장:4).

공자에게 있어서 그릇(器)이란 한 가지 쓰임새 밖에 없다는 말로써 별로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공에게는 “너는 그릇이다”라고 말한다. 자공은 세속적인 의미로 평가하면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이재에 밝아 중국역사에 남는 거부(巨富)가 되었으며, 춘추시대 최고의 외교협상가 중 하나였다. 공자에게도 끔찍이 잘해서 천하주유를 인맥·자금 등 실질적으로 지원했다. 사마천의 「화식열전」과 「중니제자열전」에는 자공의 뛰어남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런 제자의 질문에 공자는 일도양단 제자의 부족함을 지적한다. 그래도 조금은 미안했던지 “너는 종묘에서 쓰는 호련”이라고 다시 말한다. 그릇 중에서도 그나마 가장 귀한 그릇이라는 뜻이다. 참 심술 굳는 선생이다(주16). 말솜씨 좋다고 소문난 재아에게는 더한 말을 한다. 재아는 그 말솜씨 때문에 여러 번 한소리를 들었던 사람이다(팔일:21). 재아가 공부를 게을리 하며 낮잠을 자는 것을 보고, 공자는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할 수 없고, 더러운 흙으로 친 담은 흙손으로 다듬을 수 없다.”고 일갈한다. 자신이 사람의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알게 된 것도 다 재아 때문이라고 그의 인격에 대못을 박는다(공야장:10).

엄격했지만 공자는 무척 사랑받는 스승이었다. 제자들은 공자가 죽은 후 모두 무덤 앞에서 3년 상을 모셨다. 그렇게 혼나던 자공은 그대로 남아 또 다른 3년의 세월동안 무덤을 지켰다. 자공은 스승을 해와 달과 같아서 넘어설 수가 없으며, 하늘과 같아서 사다리를 놓고도 올라갈 수 없는 그런 존재라고 말했다(자장:24/25)(주17). 단순히 공자학문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스승과 제자간의 깊은 신뢰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공자는 참 행복한 선생이었다(주18).

2. 공자와 맹자가 바라던 세상

1) 인의(仁義)의 정치

춘추전국시대를 살아갔던 공자와 맹자는 힘(覇道)과 사익(利)이 지배하는 세계와는 다른 어짊(仁)과 공익(義)의 가치관을 중요시했다. 인간본성의 선함을 믿으며, 그 선한 본성이 인간을 인의예지의 세계로 잘 이끌어 갈 것이라고 믿었다. 공자는 어짊(仁)을 강조했다. 논어에서는 어짊을 다양하게 표현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愛人, 안연:22), 모든 일에 진심을 다하고, 남을 잘 배려하는 것이다(忠恕, 이인:15).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으며(己所不欲勿施於人, 안연:2), 위선적인 말과 행동(巧言令色)을 삼가는 것이다(학이:3).

맹자는 어짊에 덧붙여 좀 더 강한 실천윤리인 의로움(義)을 강조했다. 이 실천윤리에 힘을 주는 강력한 무기가 성선설(性善說)이다.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는 인식은 “마치 물이 아래쪽으로만 흘러가는 것”과 같이 맹자에게 있어서는 자명한 일이었다(맹자고자(상):147). 그런데 지금 사람의 마음이 각박해 진 것은 그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주19). 맹자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남의 불행을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유명한 우물가 어린애의 비유를 든다. 어린애가 우물 속으로 떨어지려 할 때 황급히 달려가 아이를 구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어린아이 부모와 사귈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도 아니고, 마을사람이나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받기를 바라기 때문도 아니며, 어린아이의 위험을 보고만 있었다는 자기에 대한 평판이 싫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참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 후 그는 유명한 사단(四端)론을 펼친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고, 잘못된 것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남에게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어짊이 시작되고(仁之端也),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의로움이 시작되며(義之端也), 사양하는 마음이 예의를 갖추게 하고(禮之端也),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지혜를 가져온다(智之端也).」(맹자공손추(상):31).

이로서 인간본성인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유가의 도덕률로 연결된다. 맹자는 공헌은 공자의 이야기를 개념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성선설, 사단(四端)론, 인의예지의 도덕 등은 바로 맹자가 정리한 내용이다. 맹자는 이런 이론전개 위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륜(五倫)을 이야기한다. 부자간의 친애함(父子有親), 군신간의 의로움(君臣有義), 부부간의 유별함(夫婦有別), 어%E